프라이데이, 로버트 하인라인
이 글은 [프라이데이]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지만, [프라이데이]는 스포일러를 알고 보든 모르고 보든 별 상관이 없는 책이다.
세번째로 읽어보는 하인라인의 책이다. 첫번째는 [스타십 트루퍼스]이고 두번째는 [은하를 넘어서](우주복 있음, 우주 출장 가능함)이었다. 순서는 그 반대인지도 모르겠다. [스타십 트루퍼스]는 영화로도 널리 알려진 것처럼 파시즘을 옹호하는 듯한 느낌을 풍기는 문제작이다. 조 홀드먼의 [영원한 전쟁]과 비교되곤 한다. [영원한 전쟁]은 정치적으로 공정하고 [스타십 트루퍼스]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은하를 넘어서]의 경우에는 그의 가장 성공적인 청소년 소설로 알고 있다. 읽어 보면 재미있고, 단순하며, 따뜻하다. 모험은 항상 집에서 맞게 되는 가정의 온기로 마무리된다는 청소년물의 공식이 적용된다.
[프라이데이] 같은 경우에는 무척 묘하다. 솔직히 한국에서 소개되는 SF들은 거의 고전적인 작품들이고 폭력이나 섹스 같은 요소가 대부분 배제된 경우가 많다. 그 이유를 따져보면 한국 특유의 보수적인 - 이중적으로 보수적인 분위기가 적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한국 장르 독자 - 더 나아가 일반 독자의 80%이상을 차지한다고 알려져 있는 20대 여성 독자들에게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황금가지에서 [플레이보이 SF 걸작선]이란 자극적인 이름으로 단편선이 나온 적이 있지만, 대다수가 매우 지성적이고 플레이보이와는 백만 광년 정도 떨어진 분위기이다.
마초스럽기로 유명한 젤라즈니의 소설들도 겉으로는 남성미를 강조하지만, 너무나 노골적으로 남성미를 강조하는 나머지 희화적이기까지 하다. 젤라즈니의 마초성이란 여성들이 장난감으로 갖고 놀 정도이지, 그들을 불쾌하게 만들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프라이데이]는 약간, 아니 매우 다르다. 소설의 주인공은 여자이고, 서두는 주인공이 윤간을 당하는 장면으로 운을 뗀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주인공이 인조인간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성적 위안부로서 정식 교육을 받은 인조인간이다.
물론 주인공 프라이데이는 매우 강인한 여성이다. 때문에 강간을 당하면서도 울부짖거나 고통을 내보이는 대신, 자신이 즐기고 있다는 연기를 해 보인다. 아마도 이 부분을 매끄럽게 읽어낼 수 있는 독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프라이데이의 연기는 프라이데이가 얼마나 강인하며, 여성이 강간이란 상황에 처해서도 얼마든지 당당해질 수 있다는 의미로 독해가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여성은 강간을 당할 때 오히려 즐긴다."라는 고전적인 마초들의 편견을 암시하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내 편집증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더욱이 프라이데이는 나중에 자신을 강간한 사람과 결혼을 하기까지 한다. 프라이데이는 신체적으로 강화된 존재이기에 얼마든지 강간범을 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왜? 프라이데이는 고양이를 사랑하는 감성적이고 자기 연민에 빠진 정서적으로 불안한 존재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프라이데이는 이름부터 상징적이다. 로빈슨 크루소의 하인 [프라이데이]가 식민지 국가 혹은 모든 유색인종을 상징하는 캐릭터라는 건 널리 알려진 담론이다. 존 레논의 노래인 [여성은 이 세상의 깜둥이다Women is the nigger of the world]가 시사하고 있듯이 여자이자,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인공 생명체인 주인공이 [프라이데이]라는 이름을 가진 건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갈수록 흥미로워지는 것은 하인라인의 설정에 따르면 인조인간은 단지 유전적으로 설계된 존재이기에, 일반적인 인간과 육안으로는 식별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인간보다 더 나은 신체적, 정신적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 성적 노리개로 쓰이거나 노예 문서에 묶여 매매된다.
인조인간은 일반 인간과 생물학적으로 동일한 존재이지만, 결코 인간으로서의 법적인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다. 그래서 프라이데이는 결혼 관계에 있던 그룹으로부터 쫓겨나는 수모를 겪는다. 소설 내내 프라이데이를 괴롭히는 건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만나는 남자에게 인조인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는다. 그들이 인조인간을 보통 인간과 동등하게 생각해주는 지 궁금해한다. 프라이데이는 때때로 상처받고 항상 고통에 몸부림친다. 영원한 낙인. 생물학적으로 차이가 없고 오히려 인간보다 우월함에도 느끼는 열등감에 프라이데이는 시달린다. 유색인종과 백인, 여자와 남자에 관련된 정치적 문제에서 항상 쟁점이 되는 사안을 연상하게 한다.
이렇게까지 민감한 사안을 전면에 부각한 하인라인의 작품은 과연 정치적으로 올바를까.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마치 여성학 SF의 대부 정도로 알려진 르 귄의 공정함과는 좀 다르다. 르 귄의 작품 중 여성학 쪽에서 주목할만한 작품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어둠의 왼손]은 곱씹을 가치가 있다. [어둠의 왼손]은 일정 주기에 따라 성별이 바뀌는 종족을 그려내고 있다. 그들에게 임신은 동물이 발정하듯이 매우 한정적인 기간에만 일어날 수 있고, 모든 종족은 때에 따라 남자일 수도 여자 일수도 있기 때문에 임신은 모두에게 주어진다. 이 세계에서 [강간]이란 개념은 성이 고정된 세계와는 다른 의미일 수밖에 없다. 애초에 발정기가 아니면 성욕이 생기지도 않을 뿐더러, 발정기에 신체가 남자나 여자로 변하는 것은 개인의 의지에 따른 것도 아니다. 강간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 차별? 만약 당신이 어제는 여자였고 오늘은 남자라면, 오늘 남자라는 이유로 여자의 취업 기회를 제한하겠는가? [어둠의 왼손]에서 남자와 여자가 평등한 과학적 근거나, 성차별 담론이 가지는 비합리성을 비판할 논리를 기대한다면 그건 엄청난 오산이다.
이수영의 [암흑제국의 패리어드]를 보면 이와 유사한 설정이 나오지만 [어둠의 왼손]보다는 [프라이데이]에 가깝다. [암흑제국의 패리어드]의 주인공은 용으로 성인이 되면 자신의 성별을 선택할 수 있다. 청소년 시기에는 여자의 몸을 가지고 있지만, 패리어드는 남자처럼 힘이 세고, 전투 능력이 뛰어나고, 입이 거칠며,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매력을 느낀다. 패리어드는 매우 아름다운 여성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결국 성인이 되어서는 자신의 본래 기질대로 남자가 되기를 선택한다. 재미있는 것은 패리어드가 침입한 암흑제국이 성역할이 전도된 국가라는 점이다. 아마도 이러한 설정은 이수영의 전작인 [귀환병 이야기]가 조 홀드먼의 [영원한 전쟁]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처럼(이는 작가 스스로 밝힌 것이다.), 르 귄의 소설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패리어드의 캐릭터는 단지 생물학적으로만 여자일뿐 남자와 다를 것 없이 행동하고 급기야는 아예 남자가 되어버린다. 이래서야 르 귄이 보여줬던 성에 대한 관점과는 근본에서부터 어긋날 수밖에 없다. 여성이 남성보다 차별받는 사회에 대한 풍자로 아마조네스 왕국 같은 세계, 남성 같은 여성 캐릭터를 선보인다면, 그것은 단지 남성 우월주의의 음화陰畵 복제품일 뿐이다.
마찬가지 논리로 [프라이데이]에서 주인공이 성별에 상관없이 자유로운 섹스를 즐기고, 건장한 남성을 단숨에 제압하면서도, 결국엔 정신적인 허약함으로 인해 남자의 품에 파고들고, 자신을 강간한 남자와 결혼하는 결말은 겉으로는 PC(Political Correctness)해 보이지만 전혀 PC하질 않다. 주인공이 강간을 당하는 장면이 주인공의 강인함을 보여주려 했든, 성에 관한 비합리적인 편견에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여성을 그리고 했든지 간에, [강간]이란 상황만으로도 충분히 불쾌할 수 있다.
번역자인 안정희씨는 후기에서 하인라인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그를 철저한 남성우월주의자라고 평가한다.([프라이데이]의 독자라면 당연히 동의하지 않을 것이지만.)."
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하인라인이 남성우월주의자이든 아니든 그건 그가 쓴 책만으로 평가하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다. (이 부분에서 이 글을 읽는 사람은 필자의 견해가 어떤지 궁금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하인라인이 남성우월주의자인지 아닌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관심도 없다.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다고 생각하고 싶다면, 그렇게 생각해도 무방하다. 필자는 하인라인 개인의 정치적 성향보다는 작품에서 정치적 견해가 구현된 양상의 흥미로움에 주목하고 싶다. 작가 개인의 정치적 성향과 작품 내에서 독해 가능한 정치적 견해는 구별해야 옳다.)
마치 [스타십 트루퍼스]만을 읽고 그를 파시스트라고 매도하는 것처럼 말이다. [프라이데이]에서 하인라인은 제국, 왕국, 공화제, 독재국가, 느슨한 자유지대 등 매우 다양한 정치 체제를 그리고 있다. 그는 민주주의 국가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친다. 완전한 민주국가인 캘리포니아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3년 전, 한 경제학자가 대학 졸업생들이 박사학위가 없는 다른 시민들에 비해 30퍼센트 가량 급료를 많이 받는 것을 알아냈다. 이러한 비민주적인 상황은 캘리포니아인들에게는 저주나 마찬가지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속도로 다음 선거에서 국민 발의가 통과되었고, 모든 캘리포니아 고교 졸업자 또는 18세 이상의 캘리포니아 시민들은 학사학위를 수여받았다."
하인라인이 비웃는 것은 민주주의가 비효율적이다 못해 우민 정치로 전락하는 상황이다. 이를 파시즘으로 바로 연결하는 것은 정치적인 수사에 익숙한 탓이다. 하인라인은 과도한 민주주의를 비웃었을 뿐, 독재국가를 찬양하지는 않았다. 캘리포니아의 민주주의가 변질된 것은 지구 전체가 [병든 문명]이기 때문이다. 딱히 민주주의라서 병든 것이 아니라 지구에 존재하기에 병든 것이다. 이 둘을 명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하인라인은 [스타십 트루퍼스]에서 군대를 다녀온 사람에게만 시민권을 주는 군국주의 국가의 이상에 대해 설파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민이 아닌 자들을 감옥에 처 넣거나, 그들의 자식들에게 시민권을 가질 기회 - 입대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단지 투표권만 제한되어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설령 [스타십 트루퍼스]가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작가 개인의 성향으로 단정하는 것은 오류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프라이데이]에서 하인라인은 정치 체제에 대해 큰 기대를 걸고 있지 않다. 어떤 체제이든지 망가지기 쉽고, "제대로 운영되는 독재국가는 효율적인 민주국가 만큼 보기 힘들다."
하인라인이 1982년에 집필한 [프라이데이]는 1959년에 집필한 [스타십 트루퍼스]와 달리 국가의 힘이 약화된 세계를 그리고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국가가 아니라 기업이다. 기업은 하나의 국가가 되었고 더욱이 전 세계를 넘어 우주까지 아우른다. 코카콜라는 페루와 같은 지역 국가보다 강력한 기업 국가이다. 그것은 2008년 현실 세계에서도 적용되는 명제이다.
하인라인의 정치성이 무뎌진 대신 그는 [인터넷]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널리 알려졌듯이 인터넷은 이미 이론적으로는 완성된 지 오래된 발명품이다. 80년대에는 대학이나 연구소 전산망으로서 원시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하인라인은 미래에 전세계의 도서관이 연결되어 집에서도 터미널을 통해 책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예견했다. 또한 과거의 연극이나 영화, 콘서트가 전자적인 정보로 저장되어 언제 어디서든 불러내서 재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있다. 검색어를 입력하여 정보를 구하는 방식 또한 거의 완벽하게 표현한다. 이것을 보면 하인라인 당시 미국 SF계에서 인터넷에 관련된 아이디어는 매우 진부한 것이었거나,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완성 상태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연결된 세상에서 오히려 미국의 각 주가 독립국으로서 정치 체제를 달리한다는 설정은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개인이 각 정치 체제를 선택할 수 있는 다양성으로 받아들인다면 일견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프라이데이는 밀사라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이 나라들을 종횡무진 누빈다. 그에게 국경이란 아무 의미도 없다.
이미 세계는 우주를 개척하여 식민지를 건설했다. 지구는 버려라. 우린 우주로 나가야 한다. 하인라인은 단지 SF 작가일 뿐이다. 그리고 뛰어난 SF 작가이다. [프라이데이]는 여자 주인공이 죽이고 섹스하고 도망 다니는 내용 일색이지만, 그녀가 사는 세상은 결코 현재가 아니다. 그녀는 우주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길을 달려간다. [프라이데이]를 성 담론에 관한 텍스트로 읽는다면 불쾌해질 것이고, 정치 체제의 실험장으로 보면 코웃음이 나올 것이고, SF 활극으로 본다면 유쾌해질 것이다.
어느 쪽이든 독자의 선택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