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나나1234 2008. 7. 7. 20:06

 전혀 PC(Political Correctness)하지 않은 작품이 오히려 궁극적으로는 PC한 경우가 있다. 반대로 너무나 노골적으로 PC를 지향한 나머지 전혀 PC하지 않게 되는 경우가 있다. 말장난 같은가. 물론 이건 말장난이다. 하지만 가끔 말장난이야말로 진실을 전하는 경우가 있다. 세상의 진실이란 명확한 언어로는 결코 본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재닛 윈터슨의 [무게]가 그렇다.

 이 작품은 [다시 쓰기]를 표방하고 있다. [다시 쓰기]는 이미 존재하는 신화, 동화 같은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구성하여 그 속에 숨은 의미를 재발견하거나 재창조하는 글쓰기이다. 때문에 [다시 쓰기]란 단순히 홍길동 전을 현대식 판타지로 바꾸는 정도의 기술技術적인 행위가 아니다. 이는 세상의 껍질을 헤쳐 새로운 인간성을 끄집어내려는 광부의 손길에 비유할 만하다. 글을 쓰는 것은 내면을 기술記述한다는 것이다. 활자화되기 전에는 알 수 없었던 자신의 새로운 면모, 익숙하지만 새롭게 조명할만한 모습을 명확한 형체로 구현해내는 일이다.

 때문에 [무게]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되는 [나는 그 이야기를 다시 하고 싶다.]라는 문장은 [다시 쓰기]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쓰기]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면 [슈렉]이 있다. [슈렉]의 공주는 일반적인 동화 속 공주와는 달리 활동적이고 자기 주장이 강하다. 때문에 그에겐 백마 탄 왕자가 아니라 숲에 사는 오거인 [슈렉]이 짝으로 나타난다. [슈렉]에서는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모든 동화들이 재해석되고 여기에는 PC - 정치적 공정함이란 잣대가 적용되고 있다. 이 잣대는 여성은 남성과 사회적으로 동등하며, 두 성의 차이는 단지 생물학적인 부문에만 한정된다, 각 인종간에 피부색을 제외한 차이는 없다, 정도로 요약되는 가치 기준이다. 물론 이 기준은 단지 성과 인종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외국인과 내국인, 가족과 공동체, 혼인자와 비혼인자 등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차별적인 시선에 적용될 수 있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공정하게 다시 쓰여진 동화는 최근에 꽤 주목을 받았다. [흑설공주 이야기]가 대표적이고 앞에서 언급한 [슈렉]도 그렇다. [흑설공주 이야기]를 출판한 뜨인돌에서는 국내 작가를 중심으로 [어린이를 위한 흑설공주 이야기]를 펴내기도 하였다. 한국에서 다시 쓰여진 동화를 계몽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여성적 글쓰기]와 [다시 쓰기]는 세밀하게 구분해야 할 개념이다. [여성적 글쓰기]란 남성 중심적인 기존 체계를 해체하는 새로운 글쓰기 방식이다. 본래 불어에서 기원하며 프랑스 페미스트인 [엘렌느 씩수]를 통해 널리 알려져 미국 문예 비평으로 흡수되었다고 한다. 엘렌느 씩수가 본래 의도한 의미는 여성의 몸에 기초한 글쓰기로 복잡한 사상적 더께가 있는 것 같지만, 현재 통용되고 있는 의미는 그냥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면 될 듯하다. [흑설공주 이야기]는 다분히 [여성적 글쓰기]라는 관점에서 집필된 것으로 보인다. (안 읽어봐서 잘 모르겠다.)

 

 아무튼 [흑설공주 이야기]가 시도한 [다시 쓰기]와 [여성적 글쓰기]는 교집합을 형성할 뿐이다. [다시 쓰기]는 여성학만이 아니라 문학이나 교육학에도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이 둘을 동일하게 봐서는 곤란하다.

 [무게]는 신화를 다시 쓰고 있음에도 작가 이름을 가린다면 남자가 쓴 글로 착각이 될 정도로 남성 중심적인 성묘사가 두드러진다. 다음 대목을 보라.

 "음경을 불뚝 세운 채 그녀를 자기 어깨 위로 옮긴 헤라클레스는 더럽고 피 묻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음부를 문질러 그녀가 젖게 만들었다. 예전에 이런 것을 느껴본 적이 없었던 그녀는 보트 위의 침상에 던져질 때쯤에는 그가 자신에게 입 맞추는 만큼이나 정열적으로 그에게 입 맞추고 있었다. 그녀는 팽팽하고 자발적이었으며 그는 그것을 사랑했다. 이 여자는 계속 갖고 있겠다."

 예민한 독자라면 필자가 이 대목을 글의 맥락에서 들어냈기 때문에 작가의 의도가 오롯이 전해지지 못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전후 사정을 설명해도 이 대목의 의미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여기서 그녀는 헤라클레스에게 결혼을 약속한 적이 있는 이올레다. 헤라클레스는 이올레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분노하여 이올레의 가족을 몰살시킨다. 그럼에도 이올레는 헤라클레스와 결혼하기를 거부하며 성벽에서 몸을 던지지만 살아남는다. 그 다음은 위의 묘사가 이어지고 이올레는 헤라클레스와 사랑에 빠져 같이 살게 된다. 만약 [여성적 글쓰기]를 시도한다면, 이올레는 헤라클레스의 부인과 동성애 관계였다거나, 이올레가 사실은 헤라클레스를 죽이기 위해 거짓으로 사랑에 빠진 척 했다거나, 이올레가 가부장제 하에서 억압된 자신의 욕망을 자각했다거나 하는 [다시 쓰기]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재닛 윈터슨은 그러지 않았다. 이올레는 그저 헤라클레스의 성적 매력에 넘어간 변덕스러운 여자다.

 헤라클레스의 남성성 - 폭력성이 긍정되는 것도 아니다. 헤라클레스는 생각 없는 깡패다. 애초에 결혼을 할 수 없는 아마조네스 여왕의 머리를 부숴버리고 자신의 양어머니 - 헤라 여신 - 앞에서 자위를 하며 그녀의 젖꼭지를 애무한다. 헤라클레스는 후레자식이다. 그러나 헤라 여신은 전형적인 팜므파탈이다. 헤라클레스의 은밀한 손길을 묵인하면서도 그를 파멸로 이끌 계획을 차분하게 권한다. 헤라는 강력한 여신이다. 헤라클레스가 헤라를 강간하지 않는 것은 그가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헤라가 손 하나만 까딱해도 헤라클레스는 죽고 만다. 헤라 여신은 신의 위치에서 헤라클레스(헤라의 영광이라는 의미)를 내려다보며 그의 죽음을 차근차근 준비한다. 헤라가 알고 보면 착한 양어머니였고 양어머니를 겁탈하려 한 헤라클레스는 죽어 마땅한 놈이었다는 식의 결말은 준비되어 있지 않다.

 재닛 윈터슨이 다시 쓰고 있는 신화는 우리에게 익숙한 그리스 신화의 아틀라스와 헤라클레스 사이의 이야기다. 아틀라스는 제우스의 노여움을 받아 지구를 짊어지게 되었고, 속죄하기 위해 열두 가지 노역을 수행하고 있는 헤라클레스는 아틀라스에게 황금사과를 따다 주기를 부탁한다. 헤라클레스는 잠시 동안 아틀라스의 무게를 대신 짊어진다. [무게]에서 아틀라스가 짊어지고 있는 무게는 사실 인간이 삶을 살아가면서 일상적으로 짊어지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너무도 무겁고 버거운 나머지 가끔 그 무게를 망각하고 마는 것이다.

 아틀라스는 소설 말미에서 우주로 간다. 아틀라스의 외로움을 덜어주기 위해서 러시아인은 스푸트니크호에 작은 개를 실어서 보내준다. 그 작은 개의 이름은 라이카다. 라이카를 돌보면서 아틀라스는 생각한다.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무게에 대해. 이미 아틀라스에게 짐을 지워 준 제우스는 신화 속으로 사라졌다. 아틀라스는 애초에 지구를, 이 우주를 짊어지고 있을 필요가 있었을까. 같은 질문은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대체 누가 우리에게 이 짐을, 이 무게를 주었는가. 설마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어서? 이에 대해서 [무게]는 헤라클레스가 구해야만 했던 황금사과를 통해 간접적으로 답변하고 있다. 구약의 선악과는 그리스 신화의 황금 사과와 유사하다. 선악과는 단지 비유일 뿐이며, 세계 신화 체계 속에서 영향받은 수많은 이미지 중 하나에 불과하다. 아직도 산타를 믿고 싶다면, 좋다. 나는 어린 아이의 꿈과 희망을 지켜주고 싶다.

 결국 작가가 꿈꾸었던 것은 남성과 여성의 문제보다 훨씬 더 광대한 영역이다. 작가는 자신의 삶과 신화와 다시 쓴 신화를 교대로 제시하며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은 왜 당신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부드럽게 권한다. 아틀라스가 마침내 지구를 내려놓고 라이카와 함께 우주 저편으로 멀어진 것처럼 이제 당신도 당신의 짐을 내려 놓으라고. 그렇게 해도 세상은 멸망하지 않는다.

 

 그렇다. 세상은 멸망하지 않는다. 여성 작가라고 해서 굳이 남성 중심적인 그리스 신화를 여성 중심적으로 고쳐 쓸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페미니즘에 경도되면 자신의 가능성을 제한할 가능성이 있다. 혹시 여성 작가는 반드시 양성 평등적인 설정이나 문장을 사용해야 [의식이 있다], [진보적이다]라고 생각해온 것은 아닐까. 그것은 남녀 차별만큼이나 위험한 굴레가 될 수 있다. 이념에 봉사하는 문학은 가장 나쁜 문학이다. 세상에 남성 중심의 사상이나 문학이 널려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획일화된 기준이다. [여성적 글쓰기]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적 글쓰기]만 하는 것이 나쁘다고 말하고 싶다.

 

 만약 이 책에서 [여성적 글쓰기]를 시도했다면 무게가 갖는 의미가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내 생각에는 양성 평등적인 사상에 묻혀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단지 [무게]를 또 다른 페미니즘 소설 중 하나로만 봤을 것이다. 이념을 전달하기 위한 확성기로 봤을 것이다. [이갈리아의 딸들]이 여성에게는 해방감을, 남성에게는 불편함을 전할 뿐, 그 이상을 전달하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남성이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고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세상이 오면 좋겠지만, 불행하게도 그런 세상이 오면 더 이상 [이갈리아의 딸들]은 읽히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고 해방감을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역설은 이념에 경도된 문학이 가지는 숙명적인 무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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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다시 쓰기]가 여성학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는 원래의 문장은 사실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물론 그것은 사실일 수도 있다. 난 잘 모르겠다. 그래서 수정했다. 나야말로 [다시 쓰기]와 [여성적 글쓰기]를 동일한 것으로 혼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