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은 책/오늘 읽은 판타지

한국 환상 문학 단편선, 김이환 외

나나나나1234 2008. 7. 19. 04:45

 

  

 - 쓸데없이 긴 서론

 

 글을 쓰기 전에 약간 고민을 했다. 좋은 얘기만 써야 할까. 아니면 내 맘대로 써야 할까. 순수 문학계에는 [주례사 비평]이란 용어가 있다. [주례사 비평]이란, 결혼식 때만 되면 아무리 망나니라도 건전한 청년이 되는 것처럼, 기사나 문학 잡지 비평을 무조건 좋게 써주는 일을 말한다. 글을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워낙 책이 안 팔리다 보니 글의 수준이 낮아도 낮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한국 영화계에서도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한국 영화가 잘 될 때는 영화 잡지에 악평을 싣자마자 그 영화의 홍보부에서 연락이 온다. 하지만 지금처럼 한국 영화가 죽을 쑤고 있을 때는 기사 작성자가 자신의 밥줄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어차피 한국 영화가 망하면 잡지도 안 팔리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영화 수준이 어떻든 간에 일단 한 명이라도 더 보게 하는 것이 영화사에게나 기자에게나 이익이다.

 

 게다가 기자도 어차피 업계인이라는 점도 한 몫한다.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다. 나중에 영화 시사회나 제작 발표회 때 또 만나게 될 사람들인데, 나쁜 평을 써서 기분 상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문학계는 더욱 좁아서 같이 술이나 마시러 몰려다니는 사람들이니 더 말해 무엇 하랴. 구멍 가게에서 서로 욕해봤자 누워서 침 뱉는 것과 다를 게 없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는 업계인도 아니고, 이런 글을 써서 책이 한 권 더 팔릴 일도 덜 팔릴 일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에 글을 쓸 때도 옛 선비들처럼 도의적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런 종류의 생각은 그냥 자의식 과잉인 경우가 많다. 애초에 인터넷에 올라온 글은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 많은 사람이 보지 않는다. 그리고 건전한 이성을 가진 독자라면 깊게 신뢰하지도 않는다. (물론 언제나 건전한 이성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때문에 나는 언제나 글을 쓸 때마다 약간 고민을 하지만 그때뿐이다. 그냥 내 맘대로 쓴다. 그것이 후회가 남지 않는 일이다. 학점? 평판? 교수의 생각? 이미지? 체면? 그게 다 무어란 말인가. 내가 만족할 수 있다면 그건 좋은 글이다.

 

 그렇다면 이 글이 잘못되었을 가능성, 그것은 어찌할 것이냐란 의문이 생긴다. 내가 오독해서 근거 없는 얘기를 마구 써놨을 경우에는 어찌하냐는 것이다. 그럴 때에는 독자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내가 만약 올바른 이야기를 써놨다면, 아무리 수위가 높은 표현이 오간다 해도 걱정이 없다. 내가 그른 이야기를 써놨다 해도, 그것은 나의 무식함을 증명할 뿐이지 책의 수준을 판정하지는 않는다. 나는 언제나 독자를 믿는다. 내가 틀렸다면 댓글로 무자비하게 지적해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것이 인터넷의 유일한 순기능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인터넷에 올라온 얘기를 마구 믿는 건 양식있는 현대인이 취해야 할 삶의 태도가 아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양식있는 현대인이 멸종하고 말았다.)

 

 

 -의미 없이 이어지는 본론

 

 책을 펴자마자 맨 처음 보게 되는 단편은 김이환씨의 [미소녀 대통령]이다. 이 작품은 아이디어는 좋지만 완성도는 떨어지는 용두사미격의 글이다. 그러나 초반에는 매우 유쾌하고, 아이디어는 신선하며, 세계관은 매력적이다.

 

 연예인을 등장인물로 채용하는 것, 말하는 동물 같은 요소가 그의 신작 [양말 줍는 소년]으로 이어지는 걸 보면, 이 단편의 세계가 발전하여 [양말 줍는 소년]이 된 것 같다. ([양말 줍는 소년]을 읽어보지 않고 인터넷 서평만 보고 쓰는 거라 확실하지 않다. 독자가 직접 읽어보고 판단하길 바란다.) 나는 김이환씨의 전작 [에비터젠의 유령]이 너무 수준 이하의 작품이라서 읽다가 던져버린 적이 있다. 하지만 [미소녀 대통령]을 보니 이 정도 세계관이라면 그의 신작 [양말을 줍는 소년]은 기대할만한 작품인 것 같다.

 

 [미소녀 대통령]의 후반부가 단순히 주인공의 독백으로만 처리된다는 점은 매우 실망스런 부분이다. 보통 설익은 작가들은 아이디어만 앞선 나머지 [보여주기]보다는 설명하는 걸 더 즐긴다. 그러나 소설이란 양식은 음식점에서처럼 완성품을 제시하는 것이지, 독자의 입을 벌린 다음에 자신이 씹어서 먹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아무리 봐도 [롤리타의 강림]이라든가 세계를 구하다가 병들어 누워 있는 소녀의 이미지, 갑자기 거대 로봇을 타게 된 소년, 가시적인 이유 없이 출현하는 괴물은 가이낙스의 애니 [에반게리온]을 떠올리게 한다. [세컨드 임팩트], 신지, 레이, 사도와 다를 게 없다. 작가는 이 점을 눈채챘어야 한다. 만약 작가가 의도적으로 오마쥬나 패러디를 시도했던 것이라면 그 시도는 실패했다. 창작인지 모방인지 구분할 수 있는 힌트가 전혀 없었다. 특히 [모빌 슈트] 개념을 연상하게 하는 로보트 조종 매커니즘 설명 부분은 [건담]의 그림자 안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건담의 애니메이터이기도 했던 [안노 히데아키]의 오마쥬를 2차적으로 답습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건담] 이후로 너무나 흔해진 설정을 그저 생각없이 적은 것인지 모르겠다. 좀 더 세밀하게 각 요소들을 조율했어야 한다. 독자는 바보가 아니다. (대중 문화적 요소를 연계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곽재식씨의 [콘도르 날개]가 훌륭한 전범이 되어주고 있다. 독자들은 참고 바란다.)

 

 이 단편은 후에 작가가 장편으로 개작했다고 한다. 현재 그의 홈페이지에서 감상할 수 있다. http://grovenor.cafe24.com

 

 

 수학 선생님이기도 한 김주영씨의 [크레바스 보험사]는 그가 황금드래곤 문학상 수상자라는 이력을 감안하고 본다면 적잖이 실망스럽다. 작중의 인물은 계속해서 자신의 불행을 [보험 계약]과 관련짓는다. 아무 이유도 없이! 물론 이유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작가가 관심을 가질만한 이유 - 내용상 [보험 계약]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작가의 계산 - 이지 독자가 관심을 가질만한 것은 아니다. 독자로 하여금 관심을 가지게 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미끼를 던져야지 다음과 같은 문장을 쓰는 건 얄팍한 수다.

 

 "어쩌면 보험에 든 탓인지도 몰라." 영현은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변명을 갖다 붙였다.

 

 "이 보험사 전화를 받은 뒤부터 계속 재수 없는 일이 생기 잖아." 영현은 그렇게 죄책감과 책임을 전가했다. 그러자 마치 말에 마법이 붙은 것처럼 그 보험사가 모든 재수 없는 일의 원인이 되었다.

 

 작가가 개입해서 사건을 조작하는 모습을 [작위적]이라고 한다. 독자의 이해력 혹은 눈치를 너무 낮게 본 게 아닌가 싶다. 이와 유사한 실수는 이수현씨도 하고 있다.

 

 [크레바스 보험사]는 정작 일을 벌여 놓고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신비한 일이 있다. 설명한다. 그리고 끝이다. 판타지는 언제나 새로운 세계에 맞는 특수한 법칙을 제시하곤 한다. 법칙은 소설의 룰을 어기지 않는 방식으로 반드시 깨져야만 한다. 이 과정에서 서사가 생겨나고 독자는 재미를 느낀다. 그러고 싶지 않다면 그런 선택이 특수한 효과를 자아내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도 않다. 안타깝게도 [크레바스 보험사]는 시작하자마자 끝나버렸다.

 

 

 정소연씨의 [마산 앞바다]는 흥미로운 단편이다. 이 작품으로 정소연씨는 서울대 대학문학상을 수상하였는데, 배명훈씨 또한 학창 시절에 이 상을 수상했다니 기묘한 일치가 더욱 재밌다. (이수현씨도 동문으로 알고 있다.) 애매하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장점일 수 있겠으나 또한 단점이기도 하다. 모호한 분위기를 자세한 상황 묘사를 생략함으로써 이루어냈는데, 안타깝게도 정확하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독자가 파악할 수 없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나는 2번 읽고 나서야 작품의 전체적인 양상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었다. 내 이해력이 무척 부족한지도 모르겠다.

 

 다 읽고 나서도 남는 찜찜함은 혹자에게는 여운일 수도 있겠으나 나에게는 단순한 불명료함일 뿐이었다. 나는 아직도 [림보]가 관광 상품이 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죽음은 대개 사람들에게 불쾌하게 여겨지는 성가신 존재다. 작품 내에서도 림보는 [징그럽다]고 표현되는데, 어째서 주위에서 아시안 게임까지 열려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전체적으로 일상적인 환상을 다루는 솜씨가 능숙하다. 작가가 번역서 선택(장애인을 다룬 sf)에서 보여준 소수자에 대한 관심도 적절한 수준에서 버무려졌다. 그러나 동성애란 소재의 울림이 너무 강해서 [림보]란 소재를 먹어 들어가고 있는 느낌도 있다. 독자가 처음 읽을 때는 과연 [림보]가 무엇인지 파악하기에도 바쁜데, 동성애까지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건 좀 힘겹지 않을까. 과도한 욕심일 수가 있다.

 

 

 박애진씨의 [문신]은 작품집에서 거의 유일하게 이차세계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솔직히 나는 이 작품에서 안도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판타지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려고 관습적이지 않은 작품들을 선정한 것은 좋다. 그렇지만 작품집이 너무 백면서생 같은 분위기가 된 것은 아쉬운 일이다. 배명훈씨의 [초록연필]이나 [미소녀 대통령], [콘도르 날개]가 유쾌한 양념을 치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좀 부족하다.

 

 [문신]은 죄를 지으면 그만큼 몸에 문신을 새기는 것으로 형벌을 대신하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주인공은 이 세계를 여행한 후 여행기를 작성해서 먹고 산다. 아무리 봐도 이 여행가란 직업은 작가의 비유로 읽힌다. 여행가가 새로운 세계에 탐닉하는 것은 작가가 새로운 소재를 갈구하는 것과 유사하다. 결국에는 여행가의 필력에 의해 성패가 결정된다는 서술은 내 추측을 확신으로 바꾸는 부분이다. 결론을 내리는 부분이 너무 설명조이긴 하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단편이다.

 

 

 백서현씨의 [윌리엄 준 씨의 보고서]는 요정 이야기의 현대적 답습이다. 이야기 전개가 너무 느리고 지루하다. 좀 더 압축적으로 쓸 수 있는 이야기인데 굳이 이렇게 질질 끈 이유를 모르겠다. 요정 이야기처럼 너무나 많이 알려진 형식을 쓸 때는 그만큼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독자가 처음부터 결말을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를 제시하고 싶다면 그것을 깰 수 있는 패를 준비해야 한다. 작가 생각에는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쉬였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그 패는 겨우 투페어였다. 

 

 굳이 영국이 배경인 이유도 모르겠다. 요정은 영국이 독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요정 이야기는 프랑스나 독일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게다가 영국을 미국으로 바꾼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이야기다.

 

 

 이수현씨의 [서로 가다]는 작가의 성실한 사전 조사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13~14세기의 세계가 손에 잡힐 듯이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배경에 서사가 압도당했다. 이야기 자체는 별 것이 없고 억지가 강하다. 치밀하게 구성된 가상의 세계일주에 들인 공력에 비해 이야기에는 얼마나 신경 썼는지 의문이 든다.

 

 주인공은 분명히 처음에는 인도로 가기를 원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것이 [흰 섬] - 그린란드로 변경되는지 이해되질 않는다. 그것은 작품의 내적 질서에 어긋나는 일이다. 주인공은 갑자기 그린란드가 서쪽에 있다는 이유에서 그곳이 서방정토라고 주장한다. 오랜 노예 생활 때문에 미친 거라면 미쳤다는 서술이나 묘사를 해주어야 한다.

 

 흰 섬. 관세음보살이 있다는 보타락가산. 관세음보살의 아버지 아미타불이 다스리는 서방정토.

 

 그러나 서방정토는 인도인들의 방위/시간관에서 유래한 용어다. 인도인의 내세來世의 방위는 해가 지는 쪽인 서쪽이다. 그들에게 동東은 과거이고 서西는 미래이다. 때문에 죽으면 서쪽으로 간다는 의미에서 서방정토라고 한 것이고 이건 우리나라의 북망산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중국에 북망산이란 지명이 정말로 있긴 하지만, 한국 사람이 죽으면 중국에 가서 산다는 얘기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정말로 서쪽에 정토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주인공은 부유한 상인의 자식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은 인물인데 상상속의 방위와 실제 방위를 혼동한다는 것은 이상하다.

 

 또한 보타락가산은 상상 속의 공간이긴 하지만, 인도에서나 중국에서는 실재하는 섬이나 산을 보타락가산으로 지명한 후 그곳에서 관세음보살을 숭배했다. 심지어 우리 나라에서도 낙산사라는 절을 지었는데, 이 [낙산洛山]이란 것이 바로 보타락가산이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주인공이 [서]라는 방위에만 집착했다고 해도 인도에 가는 게 맞다. 지금이야 서양이라고 하면 유럽을 떠올리지만, 14세기의 유럽이란 미개한 족속들이 사는 뒤처진 땅이었다. 중국인이 관심을 가질만한 서쪽의 땅은 당연히 중앙 아시아 지방과 인도였다. 이것은 서양인이 오리엔트라고 하면 중앙 아시아나 인도를 떠올리지 동북 아시아를 떠올리지는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더군다나 불교가 인도에서 전래하였다는 것을 독실한 불교 신자를 유모로 둔 주인공이 몰랐을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여행가들을 친구로 뒀기에 세계 사정에 비교적 밝은 사람이기까지 하다.

 

 마지막에 주인공의 지친 영혼이 앙코르 톰으로 돌아가는 부분은 너무 뜬금 없다. 앙코르 톰은 이미 주인공이 실망한 공간이다. 다음 문장을 보면 마치 관세음보살의 가피로 공간이동을 했다는 식이다.

 

 (전략) 혹은 자비로운 관세음보살은 왜 그에게 굳이 생의 끝에 몇 시간의 유예를 주어 이것을 보여 준 것일까.

 

 관세음보살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도 되는가. 만약 고대 소설 식의 결말을 의도한 거라면 처음부터 힌트를 줬어야 했다. 마치 역사 소설인 것처럼 [필자]를 내세워 기술해 놓고, 나중에 가서는 단순히 환상적인 부분 하나를 달랑 첨가한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가 어렵다.

 

 서양에서는 [동]이 신비스러운 방위로 여겨졌다. 미지의 장소이며 마법이 살아 있는 곳이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톨킨에게는 [서]가 중요한 방위였다. 엘프들은 회색 항구에서 발리노르로 떠난다. 동쪽은 악마인 사우론이 지배하는 땅이다. 작가가 동쪽 대신 서쪽을 선택한 이유가 단순히 역오리엔탈리즘인지, 아니면 톨킨의 영향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서로 가다]에서 [서]란 방위가 가진 문화적 함의가 충분하게 고려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작품의 대사나 서술을 보면 이러한 비약에 대해 변명을 하는 듯한 부분이 여럿 보인다. 하지만 작가가 작품의 단점을 알고 있고 변명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감추어지거나 상쇄되지는 않는다. 해결책은 아예 비약하는 부분을 삭제하거나 그것을 상쇄할만한 적당한 카드를 준비해야 한다. 정신 이상이라면 주인공의 정신 이상을 묘사해야지 알 수 없다, 모르겠다고 서술해봤자 소용 없다. 그런다고 해서 신비스럽거나 환상적인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은 아니다. 기법이나 서술의 모호함과 환상은 구분되어야만 한다.

 

 신비스런 공간에 대한 비이성적인 동경을 다룬 작품으로는 [톨킨의 환상 서가]에 실린 존 버컨의 [머나먼 제도]가 일독할 만하다. 혈통에서 기인하는 신비한 공간에 대한 충동이 어떻게 한 인간의 생을 잠식하는지를 알 수 있는 훌륭한 전범이다.

 

 

 은림씨의 [할머니 나무]는 황금드래곤 문학상 수상작 답게 탄탄한 기본기가 엿보이는 작품이다. 문장도 나름대로 안정되어 있고 이야기 진행도 유려하다. 구성의 묘도 적절하게 살렸다. 여성성을 나무를 통해 긍정한다는 아이디어도 매우 좋다. 약간 심심한 것이 좀 흠이다.

 

 

 배명훈씨의 [초록연필]. 이건 여러 소리 늘어놓을 필요가 없다. 여러분은 이제야 한 명의 제대로 된 SF 작가를 얻었다. 지금까지 듀나 말고는 한국에 sf 작가가 없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이제 배명훈이 있다.

 

 일단 읽어 보라.

 

 

 곽재식씨의 [콘도르 날개]는 작가의 개인적 취향이 반영된 유쾌한 작품이다. 한국의 B급 영화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웹진 [거울]에 게재된 것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다. 독자들이 직접 읽고 어떤 쪽이 더 나은지 판단하길 바란다. 재귀 소설로서도 구색을 갖추었다. 올드 게이머라면 웃음을 지을만한 숨은 그림 찾기도 몇 개 있다.

 

 

 마지막 단편인 김보영씨의 [몽중몽]은 환상 문학이란 이름에 걸맞은 몽환적인 작품이다. [몽중몽]의 변용에 관한 이미지는 젤라즈니의 단편 [사랑은 허수]나 앰버 연대기에서 그림자 세계를 걷는 부분을 연상하게 한다. 읽을수록 독자를 몽롱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이 단편집에 어울리는 가장 적절한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몽중몽]은 모호함이 어떻게 환상과 연계되는지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소설이다.

 

 

 -차마 내릴 수 없는 결론

 

 전체적으로 평가하자면 [한국 환상 문학 단편선]은 뒤표지에 나온 것처럼 "한국 환상 문학의 놀라운 도약!"이라고까지 칭하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다. 내가 황금가지나 웹진 거울에 대해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런 평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선집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보여주는 주목할만한 책임에는 틀림이 없다. 배명훈씨는 이번에도 멋진 솜씨를 보여줬다. 배명훈씨의 개인 단편집이 조만간 나오기를 기대한다. 김이환씨나 정소연씨, 은림씨도 주목할만하다. (박애진씨도. ^^)

 

 하지만 이것저것 상을 받은 작가들이나 정식 지면을 통해 소개된 작가들조차 아직은 읽을만한 작품을 쓰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다. 문장이 너무 맛없다. 단순히 맞춤법을 틀리지 않거나 번역투를 벗어나는 정도에만 그친다. 글을 읽는 재미가 부족하다. 이야기나 구조도 치밀하지 못하다. 단순히 환상적인 이야기를 창작하고 있다는 선에서 만족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자신이 소설을 쓰고 있고 그 소설은 [끝내줘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결정적으로 지루하다. 독자의 감정선을 거의 건드리지 못한다. 공포, 희열, 분노, 슬픔, 놀람.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지 못하다. 애초에 그러고자 하는 시도조차 보이지 않는다. 단편에 필수적인 반전(물리적이거나 논리적이거나.)도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국내에 들어온 장르 문학은 이상하게도 너무나 지성적인(?) 작품들이 많고, 19세기나 20세기 중반의 먼지 쌓인 작품들만 많이 소개되었다. 국내 창작 분야에서는 반대로 저열한 활극 수준의 작품이 판을 치는 바람에 이 두 가지 흐름이 부정적인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낸 듯하다. 작가들이 개인적인 취향과 대중적인 재미 사이에서 멋진 접점을 찾아내기를 기원한다.

 

 이 선집은 앞으로 한국의 환상 문학계를 견인할 [도약대]가 될 것이다. 독자 여러분은 이 선집에 작품을 수록한 작가들의 이름을 기억해 두시라. 앞으로 10년이 지나면 한국 문학의 기수가 될 사람이 나올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