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은 책/오늘 읽은 판타지

스퀴데리 양, E.T.A. 호프만

나나나나1234 2008. 7. 22. 01:38

  에테아 호프만은 참 별 소설도 다 썼다 싶다. 이 소설은 소녀 같은 감성을 지닌 (마음만) 젊은 할머니 탐정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할머니 탐정이라면 우리도 [미스 마플]이나 [제시카의 추리 극장] 같은 익숙한 인물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건 20세기의 일이고, 이건 19세기다. 창작 연도는 19세기이면서 소설의 배경은 또 17세기 프랑스다. 스퀴데리란 인물은 17세기에 실존했던 여류 작가로 연애담이나 살롱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10권씩이나 쓴 대단하다면 대단한 작가다. 프랑스의 제인 오스틴 정도 되는 것 같다.

 

   유명한 실존 인물을 탐정으로 쓴 작품은 최근에 유행처럼 출판되었다. 황금가지에서 나온 [단테클럽]은 시인 롱펠로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단테의 모자이크 살인]은 아예 시인 단테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방각본 살인사건]도 정조 시대의 문인들을 등장인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추리 소설 중에는 나폴레옹을 주인공으로 하는 것도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추리 소설을 에테아 호프만은 이미 19세기에 썼다.  

 

 독특하다. 독특해!

 

 대단하다. 대단해!

 

 외국 소설을 읽다 보면 "에테아 호프만의 소설에나 나올 법한", "마치 호프만의 소설 같은" 이란 대목을 자주 마주치게 된다. 호프만이 그렇게 대단한 인물인가 싶었는데 이 소설을 보니 정말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문장만 현대식으로 바꾸고 약간 각색하면 충분히 지금 소설 시장에 내놓아도 팔릴 작품이다. 소설 구조나 이야기의 전개도 매우 매끄럽고 현대적이다. 물론 인물 묘사가 구식인데다 왕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 역할을 하긴 하지만, 이것이 약점이 되기보다는 장점으로 작용한다. 그만큼 에테아 호프만의 소설은 근사하다.

 

 호프만은 낮에는 판사로서 공무를 수행하고 밤에는 문인들과 술을 마시며 글을 썼다고 한다. 유명한 작가들은 지루한 직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있다. 프란츠 카프카만 해도 보험회사에서 일했다고 한다. 이상은 잘 알려졌다시피 조선 총독부 건축 기사였다. 호프만의 작품이 보여주는 기묘한 환상성은 그의 직업과 여가 생활이 자아내는 괴리감에서 온 것은 아니었을까. 스퀴데리양은 매우 암울하고 기묘한 분위기를 지속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환상 소설은 아니다. 전형적인 추리 소설이다.

 

 때문에 번역자는 후기에서 [스퀴데리 양]이 포의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보다 20년 앞선 것을 두고, 이 작품이 추리 소설의 새로운 효시라고 주장한다. 이는 자세하게 문헌적인 조사를 해봐야 아는 일이지 함부로 주장할 일이 아니다. 이런 주장은 마치 톨킨이 현대 판타지를 창시했다는 얘기처럼 오해의 소지가 있다.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도 정말로 후대의 추리 작가, 코난 도일이나 아가사 크리스티에게 얼마나 영향을 줬는지 실증적으로 조사해 볼 일이다.

 

 흔히 어떤 작품이 특정 장르의 효시로 지목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주장은 마치 후대의 작품들이 모두 다 그 작품을 전범으로 삼고 흉내냈다는 느낌을 준다. 특히 톨킨의 [반지 전쟁] 같은 경우에는 이러한 경향이 너무 강하다. 톨킨이 [이차 세계]란 용어도 만들고, 서사시적인 판타지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을 쓴 것은 맞다. 하지만 톨킨이 "전혀 다른 세계에서 벌어지는 완벽하게 독립된 환상적인 이야기"를 최초로 쓴 사람이라 할 수는 없다. 톨킨 이전에도 톨킨 풍의 글을 쓰는 사람은 있었고, 톨킨 시대에도 있었다. 단지 그들 중에서 톨킨이 가장 유명할 뿐이다.

 

 더글라스 앤더슨이 편집한 [톨킨의 환상 서가]에는 오스틴 태펀 라이트의 [알위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은 오스틴 태펀 라이트가 창조한 [아이슬란디아]란 세계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 세계는 마치 톨킨의 [중간 세계]처럼 자신만의 역사, 문화, 음악, 언어를 갖고 있다. 오스틴 태펀 라이트는 자신이 창조해 낸 세계에 대한 기록을 톨킨이 [실마릴리온]을 쓴 것처럼 장대한 역사로 기술했다. 그 중 일부가 [알위나 이야기]이다. 톨킨 당시에도 기자들이 둘 사이의 유사점에 주목하여 톨킨에게 오스틴 태펀 라이트의 작품을 읽어 보았냐고 물었지만 톨킨은 부정했다고 한다. (htp://en.wikipedia.org/wiki/Islandia_%28book%29)

 

 이처럼 톨킨 식의 판타지 또한 다른 작가가 이미 창작해놓은 경우가 있다. [아이슬란디아]가 출판된 것은 1942년의 일이고 톨킨의 [반지 전쟁]이 출판된 것은 1954년이다. 톨킨이 후에 창작된 판타지 소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톨킨이 현대의 모든 판타지에 영향을 끼쳤다거나, 그로부터 발생하는 계보학이 판타지란 장르 전체를 아우를 수는 없다. 이건 문학에만 한정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섹스 피스톨즈]가 펑크락을 만들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미국에선 이미 60년대부터 [개러지 락] 같은 프로토 펑크라고 할 수 있는 흐름이 있었다. [섹스 피스톨즈]는 시끄럽고 단순한 음악을 하는 밴드 중에서 가장 유명해졌을 뿐이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스퀴데리 양]을 추리 소설의 효시라고 생각하는 건 무리가 있을 것 같다. 이 작품이 추리 소설의 형식을 갖춘 것은 사실이나, 실제로 스퀴데리 양이 추리를 해서 사건을 해결하지는 않는다. 대신 왕의 자비에 기대를 건다. 마치 우리나라 사극에서 후궁들이 왕이 어떤 침소로 가느냐하는 문제에 목숨을 거는 것과 유사하다. 왕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서 작품 전체의 향방을 결정한다. 어쩌면 호프만이 실제 스퀴데리의 작품을 패러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궁중에서 벌어지는 여자들의 미세한 권력 싸움이나 왕의 심기에 따라 문제가 해결되는 양상을 그리는 소설 말이다. (물론 스퀴데리가 쓴 소설이 정말로 그런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스퀴데리 양의 무기는 이성이 아니라 자비심과 자애로움, 고결한 품격이다. 그녀는 옷차림과 행동거지로 왕을 압도하고 그의 자비를 얻어낸다. 또한 알리바이 대신 사랑에 빠진 소녀의 인성을 감안하여 용의자의 유무죄를 판단한다. 스퀴데리 양은 탐정이긴 하지만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은 아니다.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왕이다. 그녀는 중개자다. 그럼에도 스퀴데리 양의 역할은 탐정이다. 그녀가 없었다면 아무도 진실을 알아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호프만은 어쩔 수 없는 옛날 사람이라서 문제를 우연으로 해결한다. 스퀴데리는 그저 우연히 진실을 알아낼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 것 뿐이다. 그러나 그 우연을 다루고 강조하는 솜씨가 아주 대단한다. 마치 고룡의 [다정검객 무정검] 초반부를 보는 것 같다. 거 왜 있지 않은가. 일본 소년 만화에도 자주 나오는 거. 마치 초반 적은 세계 최강처럼 그려지지만 나중에 가서 보면 아무것도 아니고, 그보다 훨씬 더 엄청난 우주적인 적들이 차례대로 기다리고 있다. 그럼에도 초반에 나오는 적이 위대해 보이는 건 작가의 연출력 덕분이다. 호프만은 그런 종류의 연출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추리 소설도 괜찮지 않은가.

 

 

 

요즘 유행인 것 같아서 나도 달았다. 추천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나도 유명 블로거가 되고 싶다. 파워 블로거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