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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여자, 장진

나나나나1234 2008. 8. 4. 04:58

 

 

잠이 안 온다. 죽을 것 같다.

 

물론 지금 내가 신세타령하자는 게 아니다. 잠이 안 온다고 해서 사람이 죽지는 않는다. 그럼 사람은 언제 죽을까. 당신은 사람이 대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는가. 어떤 소설을 보니까 사람은 잊힐 때 죽는다고 한다. 장진의 경우에는 불치병에 걸릴 때 죽는다고 말한다. 특히 코를 심하게 파다가 코피가 나는 것이 불치병의 증상이다.

 

잠깐. 지금 혹시 내 글을 읽다 창을 꺼버리려고 했는가? 내 글이 너무 중구난방이고 뜬금 없고, 엉뚱해서? 그래도 잠시만 참고 이 글을 끝까지 읽어 보길 바란다. 어차피 당신도 시간 남아서 이 글을 클릭한 걸 다 알고 있다. 조금만 내게 시간을 더 주길 바란다. 내가 지금 잠이 안와서 이러는 게 아니다.

 

장진의 영화는 지금 내 글처럼 황당한 상황 설정, 끝없는 말장난으로 이루어진 콩트의 연속이다.

 

내 경우에는 이 영화를 이나영 때문에 봤다. 이나영은 정말 귀엽다. 어떤 사람은 이나영이 ET 같다고 하지만, 사실 나도 이나영이 ET 같다고 생각한다. ET는 귀엽지 않은가. 이 영화에서 이나영이 매력적으로 나오는 이유는 이나영이 연기를 잘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장진이 영화에서 서사보다 캐릭터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아는 여자]에는 줄거리랄 게 없다. 설정과 캐릭터, 이 둘이 연합해서 벌이는 한바탕 슬랩스틱, 말장난 코미디다. 영화식 개콘이라고 보면 된다.

 

기본 설정은 이렇다. 야구 선수 동치성은 어느날 불치병 선고를 받는다. 2달 밖에 못 산다는 것이다. 너무 괴로워서 술에 취해 인사 불성이 되었는데 어떤 여자가 갑자기 나타나서 그를 여관으로 데려간다. 근데 이 여자는 알고 보니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고, 동치성을 오랫동안 사랑한 여자다. 이 여자가 바로 이나영인데, 사차원에 접속하는 최강희처럼 엉뚱한 짓을 계속한다. 이나영은 그와 함께 여관까지 가게 된 에피소드를 라디오 방송국 5군데에 보내서 전부 다 당첨이 되고, 동치성은 집에 오는 내내 자신의 경험을 라디오에서 듣게 된다는 식이다.

 

흥미롭다. 이나영처럼 귀엽고 예쁜 여자가 (아, 물론 당신이 지금 이나영이 대체 어디가 예쁜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동치성 - 정재영처럼 나이 들고 한물 간 야구 선수를, 얼굴도 그리 빼어나지 않고 머리 숱도 없는 남자를 좋아한다니. 그것도 어렸을 때부터 혼자서 오래도록 좋아했는데, 이제서야 자신의 사랑을 조금씩 보여주고 있다니. 그것도 저렇게 엉뚱한 방식으로 말이다.

근데 그게 다다. 그거 말고는 더 이상 이야기가 전혀 진행되질 않는다. 물론 변화는 있다. 갑자기 주인공 집에 도둑이 든다거나, 동치성의 불치병이 사실 오진이었다는 것 말이다. 하지만 그 사이를 채워주는 것이 말장난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나는 씨네 21 같은 잡지에서 [장진식 개그]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아 그게 뭐지? 싶었는데 이제는 분명히 알게 되었다. 장진은 말도 안되는 썰렁한 개그를 구사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이나영이 정재영이 연습하고 있는 구장에 찾아온다.

"어떻게 왔어요?"
"물어물어 왔죠."
"지금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아저씨 왜 그러셨어요? 아저씨, 얼굴은 못 생겨도 착한 사람이었잖아요."
"예?"

 

그의 개그 스타일은 아메리칸 스타일도 아니고 잉글리시 스타일도 아니고 코리안 스타일도 아니다. 그건 오롯이 [장진식 개그]다. 크게 웃음이 터지는 게 아니라 실소를 유발한다. 그가 개그를 치는 방식은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말꼬리를 잡는 말장난 개그. 상대방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후에 그 뜻은 변형한다. "어떻게 왔어요?"는 맥락상 "무슨 이유로 왔어요?" 임에도 이나영으로 하여금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이게 웃긴가? 장진은 아무래도 뭔가 좀 이상한 사람이다.

 

다른 하나는 상황을 이용한 개그다. 고전적이고 효과적인 방식이긴 한데, 장진식 상황 개그는 뭔가 좀 나사가 빠졌다. 위에서 든 예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정재영 동네에 도둑이 든다. 그런데 이 도둑이 정재영 집으로 들어와 숨는다. 정재영은 도둑을 제압하지만 알고보니 도둑의 사정이 딱해서 오히려 돈을 준다. 도둑은 나름대로 양심이 있어서 그의 집에 가방을 놔두고 간다. 그런데 경찰이 이걸 알고 정재영을 장물아비로 몰고, 이나영도 정재영을 범죄자로 오해해서, 그의 직장인 야구장까지 찾아간 것이다. 그래서 갑자기 "아저씨 왜 그러셨어요? 얼굴은 못 생겨도 착한 사람이었잖아요." 라는 엉뚱하고 황당한 대사가 가능해진다.

 

이게 한 두 번이면, 아 그렇구나 싶어서 웃어 넘길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어떤 사람에게는 좀 웃기기도 한다. 나도 좀 웃었다. 그런데 영화 전체가 이런 식이다. 모든 씬마다 하나나 두개 정도 이런 개그가 들어있다. 거의 강박적이라서 무섭기까지 하다. 장진은 관객을 어떻게든 자기식 개그로 웃기지 않으면 참지 못하는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어딘가 나사 빠진 개그가 도처에 깔려 있다.

 

정재영이 이나영과 헤어지기 전에 캔 음료수를 나눠 마신다. 둘의 집은 100M안에 있다. 정재영은 헤어지면서 캔을 가로로 밟아 신발에 달라붙게 한다. 캔의 모양이 신발에 딱 맞도록 변형된다. 그리고는 그대로 걸어가면서 "쓰레기는 우리 집에 버릴게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걸어가다가 갑자기 병증이 발해서 쓰러진다. 응급실로 실려간 정재영의 신발에는 여전히 음료수 캔이 붙어 있다. 음료수 캔 클로즈 업.

 

정재영과 이나영의 부모님은 같은 사고로 돌아가셨다. 같은 동네 사람들끼리 비행기 여행을 갔는데 추락사한 것이다. 정재영은 시합 중에 아버지로부터 기내에서 건 전화를 받는다. 아버지는 추락 내내 정재영과 통화를 한다. 죽기 전에 "아들아 나는 사랑한다."라는 말을 남긴다. 감동적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나영이 "원래 이륙 중에는 전화 쓰면 안 되는데 용케도 하셨네요."라고 대사를 친다. 정재영이 짜증을 내며 "비행기 여행 처음하면 그럴 수도 있죠."라고 받는다.

 

이런 식이다. 계속 계속 계속 이런 식이다.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그 상황이 웃긴 상황이든 심각한 상황이든, 때와 시를 가리지 않고, 엉뚱하고 황당하고 어색한 상황과 말장난을 끊임없이 만들어내서 영화를 완전히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나영과 정재영은 영화를 찍고 있는 게 아니다. 100개짜리 장진식 개그 콩트를 찍고 있다. 그 속에서 이나영은 그냥 사차원 짝사랑 소녀라는 역할을 맡고 있고, 정재영은 불치병 걸린 야구 선수 역할이다. 이건 개그 콘서트에서 유세윤이 닥터 피시의 보컬 역할이거나 양상국이 닥터 피시의 유일한 팬 역할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 둘 사이에서 어떤 서사가 진행되지는 않는다. 개그는 느슨한 관련성 - 대개 말장난이거나 상황의 맥락적 유사성 - 을 근거로 진행되고, 그 속에서 줄거리 같은 것은 없이 그저 캐릭터만 부각된다.

 

즉 [아는 여자]의 서사는 캐릭터의 서사일 뿐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캐릭터의 서사와 작품 자체의 서사는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캐릭터는 나름대로 이야기를 갖고 있다. 그는 그만의 역사와 경험을 지니고 있고, 영화나 소설을 통해서 그가 보여주는 것은, 그 캐릭터의 본래 모습의 100분의 1도 안된다. 때문에 그 캐릭터가 선보이는 동작 하나, 말 한마디가 전부 캐릭터의 서사를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이것이 작품 자체의 서사와 연계가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을 대체할 수는 없다. 캐릭터가 강조되는 작품군들이 분명히 있기는 있다. 캐릭터가 너무 강해서 서사를 잡아먹는 것처럼 보이는 작품들 중에도 걸작은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는 캐릭터가 강조됨으로써 서사가 탄생해야 하는데, 이 경우에는 반대로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서 서사가 준비되어 있고, 캐릭터를 강조하기 [위해서] 서사를 마구 조종한다.

 

정재영이 망가지는 걸 보고 싶다고? 이나영이 질질 짜는 모습을 보고 싶어? 그럼 알고 보니 정재영은 불치병이 아니었다고 얘기를 풀어나가자고. 그럼 정재영은 지금 집도 없고 직장도 잃었으니까 분노해야 하잖아. 그렇다. 정재영이 분노하는 이유가, 그가 집도 없고 직장도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정재영을 분노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의 집을 빼았고 직장도 훔쳐버린 것이다. 정재영이 불치병이 아니게 되는 이유는 단지 이나영을 울릴 이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장진은 뭔가 엄청난 착각을 하고 영화를 만들었다. 캐릭터를 강조하기 위해서 서사를 조종하는 게 아니라, 그 둘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같이 가야만 한다. 그리고 캐릭터와 서사의 사이를 말장난으로 채우는 게 아니라 그에 합당한 다른 요소를 찾았어야 한다. 말장난이나 개그는 그냥 관객의 눈을 초반에 잡아두기 위해서, 혹은 중간에 지루해질 때 막간극으로써 양념 정도로만 치는 것이다.

 

장진은 각본 실력이 엄청난 사람이다. 그가 각본을 쓴 작품 중 유명한 것만 대보자면, [웰컴 투 동막골], [동감], [개 같은 날의 오후], [바르게 살자] 같은 것들이 있다. 그런데 장진은 자신이 감독만 하면 그놈의 장진식 개그를 남발하는 바람에 망하고 만다. [기막힌 사내들]이나 [간첩 리철진] 같은 경우가 그것이다. [킬러들의 수다]처럼 괜찮은 성적을 보인 영화도 있지만, 그가 각본을 쓴 영화가 보여준 엄청난 성공에 비하면, 장진 자신의 실력과 장진이 크게 활약했던 시기 한국 영화의 엄청난 호황에 비하면, 장진이 감독한 영화들은 흥행 성적이 비교적 좋지 않은 편이다.

 

[바르게 살자]는 그가 각본을 썼고, 흔히 장진 사단이라고 칭하는 제작진들이 투입되었으며, 장진의 조감독 출신인 라희찬 감독이 연출했고, 장진의 페르소나인 정재영이 주연을 맡아서 상당히 [장진표 영화]라는 평을 받았음에도, 영화에는 장진식 개그는 적은 대신, 장진 특유의 연극적 연출과 몽환적이고 유쾌한 상황 설정이 빛을 발함으로써, 영화 자체도 완성도가 높고 흥행 성적도 괜찮게 나오게 되었다. 그러니까 장진은 자신이 감독을 맡으면 너무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만 하다 보니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 [아는 여자]는 이런 장진의 성향이 매우 극대화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나영은 예쁘다. 하악하악. 이나영 아니었으면 이 영화를 끝까지 못 봤을지도 모르겠다. 여러분 모두 요즘 활동이 뜸한 이나영의 아리따운 모습을 감상하기 위해서라도 [아는 여자]를 봤으면 좋겠다. 라는 건 농담이 아니다. 하지만 [아는 여자]가 너무 느슨한 이야기인데다, [말하기] 방식을 조잡하게 사용하는 바람에, 관객에게 "너도 사랑이 뭔지 한번 생각해 봐!"라고 강력하게 강요하는 느낌이라서 맛이 떨어진다. 정재영의 연기도 좋고 이나영은 이쁘며 장진도 카메오 출연을 밥 먹듯이 해서인지 연기를 잘하는데, 곳곳에서 어설픈 부분들이 너무 대놓고 드러나는 편이라 영화 자체는 심각하게 완성도가 떨어진다. 관객수도 83만으로 제작비나 겨우 건진 수준이다. 하지만 장진은 각본이나 영화나 꽤 다작을 하는 사람이고 71년생으로 아직 젊은 나이이기에, 그의 장진식 개그가 어떤 식으로 심화되는지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아, 장진이 [개 같은 날의 오후] 쓴 나이에 나는 뭐하는 거람. 새벽에 이런 거나 쓰고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