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은 책/오늘 읽은 판타지

뱀파이어 걸작선, 니콜라이 고골 외

나나나나1234 2008. 8. 14. 10:42

 

 확실히 진보한 선집이다. 내 정보력으로는 이것이 정진영씨가 번역하고 고른  네 번째 호러 단편집으로 알고 있다. 말 그대로 100개나 되는 단편을 몰아 넣은 [세계 호러단편 100선]에 비하면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이다. 뱀파이어로 소재를 한정했기 때문에 선택과 집중이라는 묘미를 잘 살렸다. 책도 가볍고 실린 작품들도 무난하게 읽을 수 있는 것들이다. [세계 호러단편 100선]은 유명 작가들의 호러 단편을 소개하겠다는 강박증과 무덤에 묻힌 영미권 작가들을 발굴하겠다는 호기가 뒤섞인 선집이었다. 때문에 읽기에도 벅차고 사기에도 벅찼다. [뱀파이어 걸작선]은 뱀파이어 소설의 초기 모습을 재현한다는 단순하고 명료한 목표가 훌륭하게 실현된 선집이다. 가격도 이만하면 적당하다. 책의 전체 분량과 각 단편의 분량도 적절한 수준에서 조율된 모습이다. [세계 호러단편 100선]에서 볼 수 있었던 문제는 그 이상한 삽화를 제외한다면 대부분 해결되었다.

 

  선집의 경우에는 각 단편간에 유기적인 연결을 어찌 할 것이냐는 문제가 제기된다. 웹진 거울의 경우에도 [흡혈귀]나 [고양이] 같은 주제를 정해서 선집을 출판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인간의 뇌는 유기적인 연관성이 있을 경우에 해당 작품을 더 재밌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원인과 결과를 탐구하려는 욕구는 본능적이다. 정진영씨는 뱀파이어 소설의 초기 계보도를 작성한 후에, 계보도에서 중요한 작품들을 번역하는 방식으로 이 욕구를 충족시켰다. 독자들은 이 선집만 읽고도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가 어떻게 해서 창작된 작품인지 깨달을 수 있다.

 

 브램 스토커가 [드라큘라]를 창작하던 시기에는 이미 드라큘라 소설이 많이 나와 있었다. 브램 스토커는 이러한 흡혈귀 소설의 장소를 동유럽이 아니라 당시 문명의 최전선이었던 영국의 런던으로 옮겼다. 그러면서도 흡혈귀 소설의 기본적인 장치들 - 지적이면서도 위험한 흡혈귀, 가련하고 연약한 여자 희생자, 이러한 희생자를 지키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고귀한 남자들, 이 남자들에게 흡혈귀에 관한 조언을 해주는 박식한 노인 - 을 빼먹지 않았다. [드라큘라]는 서간체를 정교하게 구사한 소설이기 때문에만 성공한 것이 아니다. 당시 대중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장르를 멋드러지게 재해석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이젠 그의 창조물 '드라큘라'가 흡혈귀의 대명사처럼 여겨지지만, 당신도 이 책 한 권만 읽으면 '드라큘라'가 얼마나 과거 작가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점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단편이 조셉 셰리든 레퍼뉴의 [카르밀라]와 존 폴리도리의 [뱀파이어]다. 브램 스토커가 사용한 귀족적 흡혈귀의 이미지가 이미 일반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작품은 현재까지 내려오는 모든 흡혈귀 소설들의 원형에 속한다. 흡혈귀?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 - 흡혈귀는 말뚝을 가슴에 박아 죽인다, 무덤을 팠더니 피에 젖어 생기 넘치는 시체가 누워 있다,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는 젊은 여자와 그를 걱정하는 아버지 - 은 이미 당시에 널리 쓰이던 소재와 인물 유형이었다. 이 두 작품만 봐도 이 책을 다 읽었다고 해도 좋다. 책을 덮고 반납한다 해도 그리 잘못된 선택은 아니다.

 

 다른 작품들은 불필요한 반복이나 사족이거나 우리가 익히 아는 흡혈귀 소설이라기에는 뭔가 좀 부족하다. 예를 들어 월터 존 데라메어의 [시튼의 이모]나 에드워드 프레더릭 벤슨의 [탑실] 같은 작품은 흡혈귀 소설 같지가 않다. [시튼의 이모]는 사람의 정기를 알게 모르게 빨아들이는 [사이킥 뱀파이어]라는 존재를 그리고 있다고 하는데, 피를 빠는 것도 아니고 단지 성격이 더러운 노처녀만 나온다. [탑실]은 소설의 90%는 보통 공포 소설이다가 결만 부분에 가서야 "알고보니 나는 흡혈귀 소설이야?"라는 식이다. 흡혈귀 소설이란 게 사실 특이할 게 뭐가 있겠는가.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에도 [장르]로 묶일 정도면 다 비슷비슷하다. 펑크나 메탈을 문외한이 들으면 다 똑같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처럼, 환생물이나 이계진입물을 보면 다 판박이인 것처럼 말이다. 정진영씨는 이 진부함의 덫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소설을 소개하려 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되기도 했다. 뱀파이어 소설 같지 않은 뱀파이어 소설을 소개하려 하다 보니, 실제로 읽어 보면 이게 뱀파이어 소설이 맞긴 한 건가? 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19세기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바니 더 뱀파이어, 피의 축제] 연작 중 하나인 제임스 맬컴 라이머의 [뱀파이어의 부활]은 학술적인 가치나, 사람들이 모르는 작품을 읽기 좋아하는 정진영씨 개인 취향 면에서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작품 자체는 상당히 수준이 떨어진다. 생전에는 선인으로 알려졌던 인물이 사실은 악인이었다는 아이러니를 강조하는 것 말고는 딱히 볼 게 없다. 브램 스토커의 단편인 [드라큘라의 손님]도 마찬가지다. 브램 스토커가 썼다는 것 말고는 장점이 없다. 재미도 없고 분량도 너무 적고 정확하게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 모를 정도로 애매하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그 유명한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의 [비이]는 약간 주목할 만하다. 이 단편에서는 첫 부분에서 괴물 노파가 젊은이의 어깨에 올라타고 그를 조종해서 달리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유형의 민담은 매우 흔한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도 고골은 러시아 지역의 민담을 작품에 상당 부분 반영한 듯하다. 제목의 '비이' 또한 러시아 민담에 나오는 괴물의 이름이다. 흡혈귀가 등장하긴 하지만 단순히 흡혈귀 소설로 끝나지는 않는다. 앞 부분에 나오는 신학생의 학교 생활를 그리는 묘사도 매우 탁월하다. 과연, 명불허전이다.

 

 그 외에 [피는 내 생명], [사라의 묘], [죽은 연인] 같은 작품들은 당시 흡혈귀 소설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는 점 말고는 딱히 이점이 없다. [죽은 연인]은 개중에서도 조금 나은 편이다.

 

 정진영씨의 다음 선집이 기다려지는 책이었다. 이번에도 작품 선정에 정진영씨의 개인 취향이 많이 반영된 듯하지만, 이 정도면 감수할 만한 수준이다. 문장도 복잡하지 않고 교정도 상당히 훌륭한 수준이다. 대충 읽어서는 띄어쓰기 하나 틀린 걸 발견하지 못한다. 정진영씨는 이미 등단한 작가로 상당한 양식을 갖춘 분이다. 번역 경력도 꽤 된다. 그의 네 번째 선집은 한국인이 자체적으로 고르고 번역한 장르 문학 선집 중에서, 내 일천한 견문으로 판단해도, 최고라고 생각한다. 작품의 전체적인 질이나 양, 작품 간 유기적 연결, 자료집으로서의 가치, 신선함 등에서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다.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