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과 미디어의 진화, 그리고 집단 지성
촛불 시위의 집단 지성
아마 몇 달 전에 벌어진 촛불 시위를 지켜보며 잠을 설친 사람이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 중에도 있을 것이다. 한국언론재단에서 발행하고 있는 월간지 ‘미디어 인사이트’ 9월호의 조사에 따르면 촛불 시위에 참여한 총 인원은 대략 33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한다. 실로 엄청난 숫자다. 마치 2002년의 광화문 거리 응원을 연상하게 하는 거대한 촛불의 행렬은 단순히 양적 수치만으도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촛불 시위의 가장 놀라운 점은 미디어와 시위의 결합이다. 촛불시위에서 일어났던 핸드폰, 인터넷 방송, 노트북, 블로그의 상호작용은 피에르 레비Pierre Revy가 말했던 집단 지성Collective intelligence를 연상시킨다. 피에르 레비는 자신의 저서인 ‘집단지성’(피에르 레비, 문학과 지성사, 2002)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집단 지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에나 분포하며, 지속적으로 가치 부여되고, 실시간으로 조정되며, 역량의 실제적 동원에 이르는 지성을 말한다. p.38"
어디에나 분포한다. 이것은 개인이 공간적 제약을 초월하여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이 시대에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한국 국민 중 핸드폰 하나 없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평소에는 그저 수다를 떠는 기계에 불과했던 물건이 전시에는 고도의 전략적 기구가 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실제 군사 훈련에서도 직업 군인들은 편의를 위해 핸드폰을 사용한다. 그만큼 핸드폰은 휴대성이 좋으며 통화 품질 또한 뛰어나다. 촛불 시위에서 시위자들은 과거처럼 깃발을 든 사람을 무작정 따라가거나 사전에 지도부로부터 교육받은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대신 인터넷이 가능한 친구와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자신의 행로를 수정했다. 인터넷의 게시판이나 댓글창을 통해 취합된 정보는 다시금 핸드폰으로 전파되며 실제적인 시위 양상에 적용되었다. 피에르 레비가 말한 집단지성의 정의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일시적인 지성체가 우리나라에 출현했던 것이다.
촛불 시위의 특징은 과거의 지도부 중심에서 편재한 대중 중심으로 옮아간 것에 있다. 대중이 강력한 지도부 없이도 일사분란하게 한 장소에 모일 수 있었던 것은 효과적인 전파 수단 덕분이다. 즉, 미디어의 힘이다. 인터넷과 휴대폰의 결합은 지금껏 존재한 적이 없었던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사람들은 공중파 방송이나 신문을 신뢰하는 대신 그리스 시대의 시민들이 광장에 모였던 것처럼 ‘아고라’ 사이트에 모여 의견을 나누었다. 이곳에서 상호 간섭하고 경쟁한 의견들은 다수의 지지를 받아 실현되었다. 단지 공론空論으로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이 새로운 미디어의 기능은 이미 기존 미디어를 일부 대체했다고 할 수 있다.
과거의 미디어 대표자들 - TV, 라디오, 신문이 일방향성을 지향한다면 새로운 미디어 - 인터넷 방송, 핸드폰, 블로그는 쌍방향성을 지향한다. 또한 이 새로운 미디어들은 결합한다. 최근 미디어 시장의 화두로 대두되고 있는 방통융합과는 달리, 사용자가 주체가 되어 각각의 미디어를 적재적소에 사용한다. 기술적으로도 이미 각각의 미디어는 결합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최근의 핸드폰은 이미 PDA 수준의 성능을 자랑한다. 핸드폰에 달린 카메라로 영상을 찍어 이것을 서버에 전송하여 다수에게 전파하는 것도 현재 기술로 가능한 일이다. 이번 촛불 시위에서는 노트북에 달린 카메라가 주로 쓰였다. 하지만 앞으로 핸드폰에 더욱 기술이 집적된다면, 핸드폰 하나로 인터넷 방송을 하고, 블로깅blogging을 하게 될 것이다. 이는 매우 근시일 내에 이루어질 일이다. 이미 LG 텔레콤의 ‘OZ’ 같은 휴대폰 인터넷 서비스가 상용화되어 있다. 미래는 우리 곁에 있다.
개인 언론의 탄생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가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과연 개인이 미디어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 글에서는 거대 자본이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언론의 탄생 가능성을 중점으로 논지를 전개하고자 한다. 현재의 신문이나 방송은 광고에 의존하며 법적, 사회적 제약이 많다. 조선, 동아, 중앙 같은 보수 언론사만이 아니라 한겨례, 경향 같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언론사도 기업이나 국가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게다가 그들 신문사의 내부적인 제약 - 데스크Desk로부터의 게이트 키핑Gate keeping, 사주로부터의 압력, 수직적 조직 문화 - 이야말로 그들이 언론으로서 가지는 가장 큰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 언론의 장점은 필터링 기능이 강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그들의 신속성과 상황 장악력을 떨어트리고 있다.
그에 반해 인터넷 게시판과 메타 블로그 사이트를 통해 이루어진 느슨한 언론 집단은 매우 신속하며, 작성자가 상황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 오늘 집회에 참여한 사람이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올리면 그것이 수많은 사람에게 전파된다. 이 포스팅Posting은 다른 블로거Blogger에 의해 해부되고 비판받으며 추천받고 검토된다. 메타 블로그 사이트는 각각의 포스팅들이 모이는 공론장 역할을 하는데, 이는 블로고스피어Blogospere라고 지칭된다. 메타 블로그 사이트에 모인 의견들은 각각의 블로그에 올라온 글들은 단지 목록화한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연대를 이룬다. 이러한 연대는 트랙백Trackback이란 링크Link 체계의 발전형태인데, 마치 거대한 의견의 바다가 존재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구체적인 사례로 들어가보자. SK 커뮤니케이션즈가 보유하고 있는 전문 블로그 사이트 ‘이글루스’(egloos.com)의 ‘이오공감 2.0’ 시스템은 블로고스피어의 훌륭한 전범이다. 이오공감 2.0 시스템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개인이 이글루스의 블로그를 돌아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글이 있으면 추천을 한다. 추천수가 5가 넘으면 이글루스의 메인에 노출된다. 만약 이 글이 적합하지 않다면, 이글루스에 6개월 이상 가입된 사용자 3명의 신고로 메인에서 삭제될 수 있다. 이외에 다른 제약은 전혀 가해지지 않는다. 이글루스 운영자는 단지 ‘관리자’의 역할에만 머문다. 다음이나 네이버 같은 포털은 메인에 노출되는 글을 운영자가 선별한다. 이글루스는 포털에 비하면 페이지뷰Pageview가 수십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메인의 편집권을 오롯이 사용자에게 맡겼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촛불 시위 당시 이오공감 2.0은 시위참여자들의 병참 기지 정도로 사용되었다. 다음의 링크에 주목하길 바란다.
http://medwon.egloos.com/1736202
이 블로그의 주인은 원광의대에 재학중인 학생이다. Polycle이란 닉네임을 사용하고 있는데, 촛불 시위가 한창 고조되고 있던 시기에 의료 봉사란 화두를 맨 처음 던졌다. Polycle은 촛불 시위가 종료되는 시점까지 각종 의약품을 소지하고 촛불 시위에 참여했다. 이 사람의 글은 올라올 때마다 이오공감에 게재되었고, 곧 Polycle을 중심으로 최대 40명까지 의료봉사단이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많은 사람들이 촛불 시위에서 활약한 의료봉사단을 뉴스에서 보았을 것이다. 그들이 바로 이들이다.
그런데 Polycle은 단지 의료봉사만을 한 것이 아니다. 이오공감을 통해 의약품 지원, 봉사자 모집, 현장 중계, 시위 참가자를 위한 매뉴얼 배포, 지원금 모금을 할 수 있었다. Polycle의 블로그는 언론인 동시에 구호 단체였고 의견 수렴 창구였고, 정보 제공처였다. 과거라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대체 어떤 시위 참가자가 공개적으로 지원금을 모금할 수 있었단 말인가. 또한 그러한 상황을 수십만의 사람에게 ‘어떻게’ 전파할 수 있었단 말인가. 10년 전만 해도 이런 종류의 의사소통이 가능한 창구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소 수만의 사람이 지켜보는, 상황에 따라서는 수백만의 사람이 접속할 수 있는 공간 - 인터넷의 사용이 가능해지면서 개인의 힘은 거대해졌다.
신神의 탄생
과거 우리는 KBS의 이산가족찾기를 통해 미디어가 가진 파급력을 실감했다. 미디어는 만인에게 전파된다. 때문에 개인이 소유할 수 없다. 이토록 강력한 무기를 누군가에게 쥐어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미디어는 공공의 것이란 허울 아래 자본과 권력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것이 사실이다. 미디어는 공공의 것이 아니라 가진 자의 것이었다. 그러나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자유로운 개인들이 직접 미디어의 생산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단지 미디어를 수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개인이 기사를 작성하고, 방송을 보도한다. 또한 기존의 미디어가 상황에서 한 걸음 물러나 방관자 차원에만 머물렀던 것에 비해, 새로운 미디어는 상황 자체에 개입한다. 직접 시위에 뛰어들어 사람들에게 의약품을 건네주고, 자신의 기사를 보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댓글을 달고 돈을 송금하고, 글을 퍼나르고, 그것을 비평하고, 동의하고 반대한다. 이들의 반응은 Polycle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인터넷에서만 맴도는 것이 아니라 현실 참여까지 이어진다. 평소에는 지켜보기만 했던 소비자가 단숨에 생산자의 위치에 올라간다. 또한 방관자였던 사람들이 사건의 주체가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블로그에 올라온 글에 댓글을 다는 행위를 통해 이미 언론의 기능을 일정부분 수행하고 있다. 사람들은 우리의 댓글을 보고 정보를 얻는다. 또한 댓글은 사건의 일부다. 때문에 미디어의 보도 대상이 된다. 이제 미디어는 미디어 자체를 다루는 일에 주력하기 시작한다. 공중파 방송이 네티즌의 동향을 소개하는 것이 이러한 맥락에서 조명될 수 있다.
새로운 시대의 미디어는 소비, 생산, 상황 창출을 동시에 이룬다. 소비자가 곧 생산자이며, 보도 대상이 곧 보도 주체다.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는 일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우리 모두가 하나의 신문사, 방송사, 라디오 방송국이 된다. 내 핸드폰이 남산의 중계탑을 대신한다. 내 싸이월드, 블로그가 중앙일보나 조선일보, KBS보다 더욱 강력한 언론사가 된다. 나는 신문기자이며 방송 아나운서이며 PD이기도 하고 사주社主이기도 하다.
개인의 미디어에는 진입 장벽이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나 기자가 되고 누구나 신문사가 될 수 있다. 인프라는 기업이 제공하고, 광고에 얽매이는 것 또한 그들이다. 혹자는 네이버 같은 거대 포털이 정치적 의사 표현을 억압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터넷은 광대하다. 해외에도 수많은 무료 공간이 존재한다. 그것을 이용하면 국내법에 저촉되지 않고 자유로운 의사개진이 가능하다. 인터넷은 초법적이며 초시공간적이다. 여기에 핸드폰과 거리에서의 직접 행위가 결합된다. 지금껏 인류가 한번도 보지 못했던 미디어가, 언론이 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미디어는 더 이상 앵무새가 되기를 거부한다. 대신 신神이 되기를 꿈꾼다. 어디에나 존재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수백만의 소리가 하나가 된다. 여기에 새로운 미디어의 신이 도래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신에게도 약점은 있다. 검증 과정의 부재가 그것이다. 언론에게 사실성과 정확성을 담보할 수 있는 장치가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다. (그러나 기존 언론은 ‘얼마나’ 정확한가. 또한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정확’하다고 할 수 있는가. 선별된 엘리트들의 검증 과정만이 과연 진실을 담보할 수 있는가. 도대체 ‘진실’이란 무엇을 의미하며, ‘누구’의 진실을 말하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의문일 수가 있다.) 이오공감의 경우를 보면 잘못된 정보가 올라왔을 경우에는 곧바로 반박글이 올라오고, 문제가 된 글은 신고당해서 사라진다. 그러나 그 반대로 올바른 소수 의견이 신고당하거나,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 유포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현재 유포자가 재판을 받고 있는 ‘여대생 사망설’이 대표적이다. 아고라를 통해 유표된 ‘여대생 사망설’은 나름대로 검증 과정이 유지되고 있는 이오공감에서조차 무차별적으로 전파되었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파장이 큰 쟁점에 관해, 우리들의 ‘집단지성’은 아직 속수무책이다.
그럼에도 나는 기존의 신을 버리고 새로운 종교로 개종하고자 한다. 이 새로운 종교의 이름은 ‘나’이며 ‘우리’이다. 촛불 시위에 배후가 없었던 것처럼 이 새로운 종교에도 배후가 없다. 나는 곧 신이며 교황이고 사제이며 신도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공성이란 미디어의 실체가 사라질 때 가능하다. 이제 미디어는 소유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소유될 수 있는 기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운 미디어는 접속된 순간에만 존재한다. 평소에는 그저 기계와 인프라만 존재한다. 개인이 핸드폰의 문자판을 누르고, 키보드를 두드릴 때 비로소 미디어는 작동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개인이지만 접속한 순간 집단이 되고, 가장 강력한 지성이 된다. 인간은 모두 섬이지만, 그 섬은 빛으로 이어져 있다.
미디어는 우리 모두의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미디어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