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은 책/오늘 읽은 sf

일러스트레이티드 맨, 레이 브래드버리

나나나나1234 2010. 4. 22. 13:48

레이 브래드버리는 다른 그랜드 마스터에 비해 국내에는 그다지 소개되지 않은 편이다. 아서 클라크나 아이작 아시모프는 한때 발에 채일 정도로 책이 많이 나왔다. 최근에는 역시 로저 젤라즈니가 유행이다. 김상훈씨는 내심 젤라즈니 전집을 내고 싶은 모양이다. 나도 물론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레이 브래드버리는 [화씨 451]을 제외하면 알려진 작품이 그다지 많지 않다.



그 유명하다는 [화성 연대기]는 오래전에 번역된 이후로 헌책조차 구경하기가 쉽지 않았다. sf 동네에는 제목은 자주 들려오지만 실물은 구경하기 힘든 작품들이 여럿 존재한다. 절판이 굉장히 빨리 되기 때문인데, 좋은 책은 나오자마자 사지 않으면 몇 달만에 못 구하게 되는 황당한 일도 일어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돈 많은 출판사인 황금가지에서 나온 단편집 [일러스트레이티드 맨]은 마치 단비와 같다.


이전에 나온 [민들레 와인]은 SF도 아니고 도대체 뭔 얘긴지를 알 수가 없어서 읽다가 때려치웠다. 이번 단편집은 [화성 연대기]와 동일한 시기에 계약되어 나왔던 책으로, 그 탄생 배경도 드라마틱하다. 40달러의 통장 잔고와 임신한 아내를 뒤에 남겨두고 5일 동안 차를 타고 뉴욕에 도착한 레이 브래드버리는 2권의 책을 동시에 계약하는데 성공한다. 그중 한 권이 바로 [화성 연대기]이고 나머지 한 권이 바로 본서, [일러스트레이티드 맨](이하 [문신남])이다.


아 진짜 제목 좀 한글로 바꿀 수 없었나.


총 18편의 단편을 엮은 이 책은 특이하게도 전체 얘기를 묶는 중심 줄거리가 존재한다. 어느날 여행하다가 온 몸에 문신을 한 노인을 만난 주인공은 그와 하룻밤을 같이 지내게 된다. 노인의 몸에 새겨진 문신은 하나하나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문신을 바라보면 저절로 문신이 움직여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이야기가 하나의 단편을 이룬다는 설정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급조한 설정이기 때문에 단편들 사이에 연관성은 별로 없다. 화성이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고, 로켓을 타고 사람들이 날아다니기는 하지만, 그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번에 행복한 책읽기에서 나온 젤라즈니의 단편집 [드림 마스터]보다 이 책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드림 마스터]는 지나치게 작품들 간에 수준이 차이나고, 분량도 한 권으로 묶기에는 너무 많았다. [문신남]은 작품의 수준이 고른 편이다. 단편보다는 엽편에 가까운 작품도 다수 실려 있어서 좀 더 편안한 독서 경험을 제공한다.


그러나 역시 너무 오래전 소설(1951년 발행)이라 시대에 뒤쳐졌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첫번째 단편인 [대초원에 놀러 오세요]만 해도 동작 인식 센서를 통해 집의 불이 켜지거나, 신발끈을 대신 묶어주는 등 생활에 편리한 전자기기들이 사용되는 미래상을 그리고 있다. 이 소설에서는 아이들이 4D TV - 실제와 동일한 감촉, 향기를 제공하는 3D 입체 영상 - 에 지나치게 빠진 나머지 기술의 노예가 된다.


이미 동작 인식 센서가 보편화되고, 4D 영화관이 존재하고, 게임 중독자들이 널린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이 단편은 SF라기보다는 단순한 풍자극으로 읽힌다. 1950년대만 하더라도 반도체 개발의 초창기로 동작 인식 센서같은 것은 꿈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조만간 발명될 일은 없겠지만 언젠가는 실용화될 수 있을 것 같은 기술로써 레이 브래드버리는 소설에 사용했다.


안타깝게도 레이 브래드버리는 아직도 살아있고, 그의 생전에 동작 인식 센서는 보편화되고 말았다. 혹자는 이러한 상황을 두고 미래를 예언하는 SF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레이 브래드버리는 과학자가 아니며, 더군다나 예언가도 아니다. 아서 클라크처럼 정지 궤도 위성에 관한 아이디어를 논문으로 발표하지도 않았다. 아서 클라크는 소설가이기 이전에 과학자였고, 그가 발표한 논문은 통신 위성의 발전으로 가는 흐름의 한 줄기를 형성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실제로 그가 통신 위성의 발명에 영향을 주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때문에 이건 단순히 작가의 상상력이 시대의 발전 속도에 따라잡힌 경우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하드한 작가가 아니다. 정교한 과학 지식으로 미래를 예언하기보다는 현란한 수식어로 현실을 풍자하기를 더 즐겼다. 때문에 그의 작품은 SF로서의 맛은 덜한 편이다.


[문신남]에 수록된 [역지사지]라는 단편은 풍자 작가로서의 면모를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는 수작이다. 근미래에 흑인들은 모두 화성으로 추방을 당한다. 지구에 남아있던 백인과 황인종들은 모두 핵전쟁으로 멸망한 상황. 어느날 지구에서 몇 안되는 백인들이 힘을 모아 로켓을 만들어 화성으로 보낸다. 화성에 있던 흑인들은 과거의 핍박을 떠올리며 분노에 휩싸이고, 지구에 남은 백인들을 차별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마지막 백인이 화성에 도착하자...


미국에서 1950년대는 흑인 차별이 극에 달했던 시기이다. 흑인들은 버스에서 백인과 같은 곳에 앉을 수 없었고, 극장에서도 자기들만의 격리석에 앉아야 했다. 백인이 버스에서 흑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도록 요구하면, 흑인은 이것을 결코 거부할 수 없었다. 남부의 주에서는 흑인에게 린치를 가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역지사지]는 이러한 미국의 차별적 상황에 대해 민감하게 대응하여 오히려 백인이 소수가 된 미래를 제시한다.


환상문학이 모두 소멸된 미래를 그리는 [화성의 미친 마법사들] 역시 SF에 냉담했던 당시 미국 사회의 일면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대중문화 중독 현상을 비판하고 있는 [콘크리트 믹서]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그의 걸작 장편 [화씨 451]에서 보여주었듯이 매카시 선풍이 휩쓸었던 당대의 미국 사회에 대해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예술가들을 모조로 빨갱이로 몰아넣고 서로 CIA에 밀고를 해대는 상황을 그는 종이가 자연발화하는 온도 - 화씨 451도로 비유했다. [화씨 451]은 책을 모두 불태우는 디스토피아를 그린 소설로,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지식과 예술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몇 년 전에 마이클 무어가 [화씨 911]이란 영화를 만들면서 무단으로 제목을 빌려온 소설이 바로 이 작품이다. 당시 레이 브래드버리는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아무래도 노망이 든 모양.


단순한 풍자 작가로 그치지 않는 레이 브래드버리는 높은 수준의 서정성 또한 보여준다. 개인적으로는 [로켓맨]과 [로켓]이 가장 빼어난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로켓맨]은 우주비행사를 아버지로 둔 아들의 시점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아버지는 우주에 갔다가 몇 달에 한 번씩만 집에 돌아오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부재에 고통스러워한다. 우주 비행사는 우주에 있을 때는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라지만, 정작 집에 돌아와서는 우주를 꿈꾼다. 아버지는 이제 우주 비행사를 그만두겠다며 마지막 비행에 나서는데...


[로켓]은 우주 여행이 일반화된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고철상을 운영하는 가족은 돈이 없어서 우주에 갈 수가 없다. 아버지는 어느날 견본 로켓을 구한다. 그것을 개조해서 가족들을 우주로 보내주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아무래도 엉터리 로켓은 대기권을 돌파하기 전에 폭발할 것만 같은데...


일본의 만화를 읽다 보면 꽤 수준 높은 SF를 많이 만나게 된다. 그 중에서도 일상적인 삶을 살면서도 우주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못하는 주인공들이 자주 나온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단편집 [N.A.S.A]가 대표적이다. NASA는 Nippon Amateur Space Association의 약자로, 주인공은 평범한 샐러리맨이면서도 꾸준히 몸을 단련하며 언젠가는 우주에 가고 싶어한다. 그가 로켓을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 표제작의 줄거리다.


[프라네테스]나 [극한의 별]에도 우주를 향한 열망을 가진 주인공은 빠지지 않는다. 물론 이들 만화에서는 개인의 동경과 국가의 우주 정복 의지를 동일시하는 거시적인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지구를 정복했듯이 우주를 정복하는 것은 끝없는 발전을 향한 욕망이고 폭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문라이트 마일]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이 만화에서는 우주 개발을 전쟁과 동일시하고 있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NASA]는 다른 만화에 비해 소박한 편이다. 그러한 소박함이 레이 브래드버리의 [로켓]에 담겨 있다. 마치 과거 한국의 시골 사람들이 63빌딩에 가고 싶어했던 그 마음으로 주인공들은 우주에 가고 싶은 것이다. 서울이 신분 상승을 상징했듯이 우주 또한 인간 현실을 초월한다는 비유이다.


꿈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


인간은 지구에 붙박혀 있고, 아직 우주는 멀다. 레이 브래드버리가 가고 싶어했던 우주는 아직도 멀다.


다른 단편들도 꽤 읽을만하다. [그분이 오셨습니다]는 깊은 종교 SF이면서도 미묘한 풍자를 담고 있고, [기나긴 비]는 전쟁을 끊임없이 내리는 비로 형상화하여 감동을 준다. [세상의 마지막 밤]이나 [도시], [에이치 아워]같은 경우에는 이미 한국에 소개된 단편으로 단편을 읽는 재미란 것이 무언인지 알려주는 작품들이다.


전체적으로 버릴만한 단편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