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나이트, 커트 보네거트
마더 나이트는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로 예전에 태초의 밤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바 있다. 태초의 밤 판본으로 읽어놓고서도, 최근 문학동네에서 나온 마더 나이트 판본으로 다시 읽었다. 태초의 밤을 읽었다는 사실을 잊었던 것이다.
커트 보네거트는 미국의 포스트 모더니스트이자 sf 작가이다. 젊은 시절에 2차 대전에 참전해서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고, 드레스덴 폭격 당시 지하실에 갇혔던 기억이 평생을 지배했다. 커트 보네거트는 소설에서 자전적인 모티프를 사용하기를 좋아한다. 특히 드레스덴 폭격은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할 뿐만 아니라 언제나 삶의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드레스덴 폭격은 연합군이 자행한 폭격으로 아무런 전략적, 전투적 목적 없이 행해졌다. 당시에 폭격을 한 이유는 단순히 지나치게 많이 생산한 무기를 소비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 결과 아름다운 도시로 이름났던 드레스덴은 일주일이 넘는 주야간의 폭격으로 완전히 녹아버렸다. 커트 보네거트는 폭격이 일어날 때마다 천장의 도료가 우수수 떨어졌다고 전한다. 그는 살아남아서 시체를 꺼내는 일을 맡았다. 통구이가 된 시체들은 갖가지 포즈로 뒤엉켜 있었다.
어머니는 아이를 안고, 연인은 서로를 감싸며.
그렇게 가는 거지.So it goes
2차대전을 겪고 미쳐버린 인물을 등장시키는 것도 그가 좋아하는 일 중 하나인데, 이 소설의 주인공이 그렇다. 마더 나이트의 주인공은 독일에서 선전방송을 했던 미국인이다. 그런데 사실은 미국의 스파이였고, 방송을 통해 암호를 보냈다. 세상에서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단 3명 뿐이다. 주인공과 그를 포섭한 미국 장교,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루즈벨트 대통령은 주인공의 선전방송을 들으며 언제나 박장대소를 했다.
주인공은 나치 전범으로 지목되지만 간신히 재판에 회부되는 것을 피해 미국에서 살아간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그를 시체처럼 만든 것은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이다. 한 명의 인간이 불의한 환경 속에서 정의롭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그에게 아무런 보답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도대체 이 빌어먹을 생의 의미는 무엇이며, 우리는 왜 아직도 죽지 않고 있는가.
커트 보네거트는 그 답으로 '사랑', 육체적 사랑을 제시한다. 소설에서는 둘만의 제국이라는 표현으로 등장하는데, 주인공과 아내는 서로 몸을 탐닉하며 외부를 잊고 행복해진다. 아무리 나치들이 유태인을 학살하더라도, 천안함이 파괴되어서 군바리들이 죽더라도 무슨 상관인가. 그녀가 있고 내가 있으며, 우리는 침대에 누워 밤새도록 사랑을 나눌 수 있는데.
커트 보네거트는 냉소적이다. 그러나 마더 나이트에서는 유난히 남녀간의 사랑을 강조한다. 삶의 아이러니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유일한 절대자로서의 사랑에 대해 말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몸에 내재된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섹스는 유전자를 교환하는 행위이고, 인간의 존재 이유이다.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사랑을 한다. 전쟁 속에서도, 학살 속에서도.
그러나 결국 인간의 사랑이란 이용되기 마련인 것이다. 삶은 우리를 속이고 비참하게 짓밟기를 좋아한다. 커트 보네거트의 결말은 언제나 비극이다.
전쟁이 어째서 나쁜가. 혹은 국가가 어째서 나쁜가.
낮에는 방송국으로 가서 유태인을 비난하고 나치를 찬양한다. 밤에 집으로 돌아오면 행복한 남편이 되어 아내와 함께 둘만의 제국을 탐험한다. 이 기슭에서 저 지평선까지. 수많은 유태인들이 가스실에서 죽어가는 바로 그 시간에, 나치의 돈으로 행복해한다. 커트 보네거트는 이런 종류의 인간을 '나라 없는 사람'이라고 칭한다. 아나키스트가 아니다. 나라 없는 사람은 체제에 순응하면서도 내적으로는 거부하는 인간이다. 삶의 저항할 수 없는 원리를 인정하고 그에 맞춰 살지만, 이 모든 것이 거짓말이고, 우린 개 같은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다. '나라 없는 사람'은 커트 보네거트가 마지막으로 남긴 에세이집의 제목이기도 하다.
주인공의 방송을 듣고 미국에 있는 온갖 정신병자들은 생의 목적을 되찾는다. 마치 뉴데일리를 보고 나이든 놈팽이들이 북한은 여전히 괴물이며, 우리나라에는 빨갱이들이 준동하고 있기 때문에 바로 우리가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나서야한다고 착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주인공이 가장 괴로울 때 그의 친구가 되어준 것은 정신병자들이었다. 유태인 혐오자들이었다. 이빨의 모양을 보면 그 사람의 혈통이 순수한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고 말하는 자만이 그를 구해주었다.
커트 보네거트는 이른바 꼴통 보수=정신병자=한나라당, 민주당, 민노당, 진보신당, 국참당, 사회당 및 이 나라의 지도층이라고 자처하는 대부분의 인사들, 우리 부모, 당신의 부모, 그리고 나, 너, 대학 교수들, 학원 강사들, 기자들, 중소기업 사장들, 삼성 회장 새끼, 운동권 경력을 팔아서 부를 획득하는 정치장사꾼들, 외교관, 장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유태인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자들은 독일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점잖고 부유한 자들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개새끼들이었다.
사회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그 사회가 바라는 가장 더러운 일,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잘한다는 뜻이다. 한국 사회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대체로 건설업을 뜻했는데, 건설업이란 가난한 사람들이 살던 집을 모조리 다 부수고, 사람들을 내쫓은 다음에 아파트를 건설해서 부자에게 준다는 뜻이다. 제조업은 무엇을 뜻하는가. 집에서 나와 오갈데 없는 젊은이들을 공장에 몰아넣고 죽을 때까지 일을 시키고, 나중에 어떻게 되든지 신경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삼성 공장에서 백혈병에 걸렸다고? 그게 도대체 삼성하고 무슨 상관이겠어? 역학 조사를 한다고 해서 결과가 나오겠냐고. 삼성이 무너지면 100만명이 넘는 국민들이 실업자가 돼. 삼성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사회에서 성공하면,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국가의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개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성공한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생각해보면 답은 쉽게 나온다. 그들은 유태인을 어떻게 해야 쉽게 많이 죽일 수 있는지 생각해낸 자들이었다.
국가란 본질적으로 타인을 이용하는 법을 연구하는 단체이고, 이용범위에는 죽음까지 포함되어 있다. 사회에 쓸모가 있다는 것은 결국 근대 사회에서 타인을 가장 효율적으로 죽일 준비가 되어있는 단체를 위해 봉사한다는 의미다. 사회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그러한 체계 속에서 가장 뛰어난 살인자, 살인 조력자가 된다는 것이고.
난 군인이 아닌데?
만약 당신이 농부라면 군량미 비축에 일조하는 것이며, 당신이 광고 업자라면 전쟁 옹호와 체제 유지에 일조하는 것이다. 당신이 가수라면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현실로부터 도피시켜 전쟁을 획책하려는 자들을 돕는 것이다.
당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자체가 범죄이니,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자는 모두 죄인이며, 이 비극적인 세상에서 방관자는 하나도 없다. 방관한다는 것은 곧 방조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읽을 때 마더 나이트는 질문을 거듭해서 던진다. 인간이 왜 국가를 만들어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는지, 또 살인자가 되는 걸 왜 자랑스러워하는지 묻는 것이다.
태초의 밤 때는 안 그랬던 인간들이
왜 지금은 그러고 다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