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장르, 라이트 노벨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명칭을 두고 입씨름을 하는 일이다. 최근에 이른바 [라이트 노벨]이란 것이 등장해서, 사람들을 열광하게 했다. [라이트 노벨]의 정의가 무엇이냐에서부터, 그런 게 존재는 하냐, 혹시 오덕들만 읽는 책 아니냐, 애니의 역소설화가 라이트 노벨 아니냐는 오해까지.

 

라이트 노벨.

 

그게 뭘까. 나도 궁금하다.

 

[장르 문학]이란 명칭도 문제가 되는 것 중 하나다. 이른바 [순수 문학] 대 [대중 문학]의 논쟁이 지겨워진 이후로 sf나 판타지, 추리, 로맨스 같은 비주류 문학들을 [장르 문학]이라고 지칭하는 조류가 은근슬쩍 인터넷을 중심으로 생겨났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볼 것도 없이 [장르]는 [분류], [종류]라는 뜻으로 문학의 형식적 특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장르 문학]은 그럴 듯한 어감이긴 하나 그냥 [분류 문학], [갈래 문학]이란 아무 의미가 없는 명칭이다. 대체 어떤 소설이 분류되지 않겠으며, 어떤 문학에 갈래가 없겠는가. 다 있지.

 

이처럼 너무나 포괄적인 명칭으로 부르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 어떤 종류의 사물을 묶어서 하나의 명칭으로 부르는 것은 그것이 대표성을 부여하여 대상의 성격을 명확하게 하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말해서 sf를 "과학적인 사고 방식으로 무장하여 독자들에게 경이감을 안겨주는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sf"라고 부르는 것이 훨씬 편하다. 만약 sf를 [종이 문학]이라든가 [출판사 문학]이라고 부른다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물론 종이에 적히지 않거나 출판사에서 출판되지 않는 문학도 있으나,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건가. 그건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다. 마찬가지로 [장르]란 전혀 본질적이지 않은 명칭이다.

 

순수 문학 - 혹은 주류 문학은 비주류 문학 - sf나 판타지처럼 세부적으로 갈래가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sf나 판타지는 다분히 소재를 기준으로 작품군이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주류 문학은 산을 그린다고 해서 [산 문학]이 되거나 강을 그린다고 해서 [강 문학]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판타지의 경우에는 이계에 진입해서 깽판을 친다고 해서 [이계진입깽판물]이라고 부르고, 소설적 배경이 현대 - 도시라는 이유만으로 [현대물], [도시물] 정도로 지칭하고, 무협과 섞인다고 해서 [퓨전물]이라는 이상한 세부적인 갈래를 마구 만들어낸다. (굳이 여기서 encyclopedia of fantasy에나 나올 요상한 구분 - 에픽이니 소드 앤 소서리스니 하는 - 을 들먹이진 않겠다. 나는 그런 걸 알지도 못할 뿐더러 굳이 그런 기준을 한국에 적용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 그게 번역서든 창작서든.)

 

 좀 더 넓게 보자. 범죄를 다룬다고 해서 [추리물]이니 [범죄물]이니 하는 이름을 붙인다거나, 사랑을 다룬다고 해서 [로맨스] 운운하는 세태는 매우 우습다. 그건 단지 출판사에서 장사를 하기 쉽도록 구매자를 특정하는 역할 말고는 그리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작가는 그저 소설을 쓰는 것이지 [추리 소설]이란 새로운 문학 형식이 있어서 그걸 쓰는 게 아니다. [추리]란 건 작품의 성격을 결정하는 요소, 기준이 될 수는 있어도 문학 형식을 특정하진 않는다. 추리 희곡, 추리 시, 추리 수필도 충분히 가능하다. 독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90년대 이전에는 [무협지]나 [추리]를 제외하고는 특정 작품군을 묶어서 파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90년대 들어 [판타지]란 새로운 [무협지]가 등장하면서 판도가 달라졌다. 사람들은 [호러]를 발견했고, [sf]를 발견했으며, [로맨스]를 발견했다. 최근에는 [칙릿]이란 도무지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괴이쩍은 광맥도 하나 발견되었다. 

 

아, 물론 [일본 소설]을 발견한 일도 빼놓으면 안되겠다. 쉽게 읽히고 만화처럼 가벼운 책들이 대거 한국 시장에 깔렸고, [에쿠니 가오리] 류의 맹맹한 작품들이 100만부이상 팔리는가 하면, 갑자기 나오키상이나 아쿠타카와상이 노벨상보다 더 권위있는 상이 되어버렸다. [공중 그네]류의 유쾌하고 즐거운 일본 소설이 한국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 소설]이란 존재하는가? 물론 존재한다. 하지만 [일본 소설]이란 구분이, 명칭이 의미가 있는가? 어떤 사람들이 한국의 대여점에서 퓨전 판타지 1000권을 빼내서 일본에 가서 번역 출판한다고 치자. 그리고 그 책들이 [한국 소설]이란 이름으로 인기를 얻는다면, 과연  그때 [한국 소설]이란 명칭은 의미가 있을까. 

 

현재 한국에서 [일본 소설]이라 지칭되는 소설들은 일본의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거나 매우 대중적인 작품들이라서 일본 소설의 전체적인 양상을 반영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일본에서 창작된 소설이긴 하나 [일본 소설]이란 이름으로 구분할 정도로 대표성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현재 한국 출판계에 깔린 [일본 소설]만 읽고 일본의 문학에 대해 논하는 건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격이다. 기사에서 흔히 [일본 소설]이라 쓰고 최근 과다하게 일본에서 수입된 소설군에 대해 논하는 건 독자로 하여금 일본에서 창작되는 소설은 다 [에쿠니 가오리] 같거나 [공중 그네] 같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일이다.

 

 [라이트 노벨], 가벼운 소설. 그게 뭔가. 책의 무게가 별로 나가지 않아서 가볍다는 건가 아니면 읽기 쉬워서 가볍다는 건가 아니면 정말로 빛이라도 뿜어져 나오는 건가. 이토록 애매모호한 명칭도 없다. 혹자는 오타쿠를 위해서 쓴, 오타쿠의 소설이 [라이트 노벨]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렇다면 대체 [오타쿠]는 어떤 자들인가. [오타쿠]는 한국의 소설가들처럼 [전국 오타쿠 협회]에서 나누어주는 증명서라도 발급받는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렇다해도 그건 의미가 없다.

 

 [라이트 노벨] 역시 실체가 없는 명칭이다. [쥬브나일]이라고 해서 10대 위주로 쓰인 삽화가 들어간 가벼운 문체의 소설이란 정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청소년 대상으로 한 소설이 모두 [라이트 노벨]이란 이름으로 팔리는 건 아니다. [라이트 노벨] 역시 출판사가 [라이트 노벨]을 원하는 독자들에게 팔기 위해서 책에 붙이는 [상표]다. 90년대에는 [판타지]가 그랬고, 2000년에는 [일본 소설]이 그랬고, 70년대에는 [무협지]가 그랬고, 80년대에는 [추리]가 그랬다.

 

 그렇다면 이런 명칭을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가. 아니다. 나 역시 이런 명칭을 매우 자주 쓴다. 나는 [장르 문학]이란 명칭을 아주 좋아한다. 일단 고급스러워 보이지 않는가. 비주류 문학이나 대중 문학보다는 훨씬 더 고급스럽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sf니 판타지니 호러니 무협이니 로맨스니 추리니 칙릿이니 팩션이니 하면서 구분도 많으니 장르 문학, 장르 소설이란 이름이 크게 잘못된 것 같지도 않다.

 

 달리 뭐라고 부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