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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는 아름답다

 나는 몇 년 전부터 홍대 주변을 돌아다니며 인디 밴드의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원래 음악 같은 걸 자주 안 들었다. 공연? 공연 같은 걸 본 적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록이나 재즈 같은 건 구경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인디 밴드의 공연을 보고 매료된 것은 그들이 너무도 적은 관객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 때문이었다. 많아야 20명, 적으면 1명도 없었다. 공연장에 갔다가 관객이 나 말고는 아무도 없어서 도망치듯 나오기도 한 적이 몇 번 있다.

 

 개그 콘서트에서는 [닥터 피시]란 개그 듀오가 이들의 현실을 풍자한다. 그건 과장이 아니다. 정말로 홍대에서는 그런 광경이 펼쳐지기도 한다. 관객은 두명이나 세명 정도이고, 그 앞에서 밴드들은 미친듯이 연주한다. 그러나 개그 콘서트에서는 그런 광경이 우습기 그지 없지만, 현실에서는 다르다. 나는 그들의 열정에서 동질감을 느꼈고 감동을 받았다.

 

 인디 밴드의 모습은 인터넷의 수많은 예비 작가들과 닮았다.

 

 조회수는 얼마 나오지 않고 댓글도 달리지 않는데도 끊임없이 글을 올리는 사람들 말이다. 가끔 장편을 올리는 사람도 있다. 아무런 보답도 얻지 못하는데 말이다. 그냥 좋아서. 즐거워서. 그들은 한다. 즐겁게 글을 쓰는 모습은 미친듯이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과 오버랩되었다. 봐주는 사람이 없다면 서로 서로 글을 읽어주면 된다. 우리끼리만 즐거워도 충분하다. 이 순간을 즐기자! 관객이나 조회수는 있어도 없어도 상관 없고, 프로가 될 가능성 따위는 관심도 없으니까.

 

 물론 나는 "프로가 되지 않겠어! 못 되는 게 아니라!" 라는 식의 건방 떠는 모습이 멋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프로가 되기 위해서 안달하며 자리를 구걸하는 모습보다는 "돈이 안되면 어때? 즐거우면 그만이잖아."라는 의식이 더 낫다고 말하고 싶다. 그 편이 프로가 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자신이 즐겁지 않은데 독자나 관객이 즐거울 것 같은가. 왜 이렇게 관객이 없나며 인상을 찌푸리는 밴드보다는 거대 페스티벌이라도 온 것처럼 발광을 하는 밴드가 더 멋있다. 

 


 아무도 책을 출판해주지 않는다면, 인디는 스스로 인쇄소에 의뢰를 해서 책을 펴낸다. [거울mirror.pe.kr]도 그렇고 서진씨가 운영자로 있는 [한페이지 단편소설1pagestory.com]도 그렇고, 코믹에 참가하는 수많은 소설 동인들도 그렇다.

 

 이렇게 스스로 상품을 생산하고 향유하고 비평하는 이들을 [인디]라고 한다. 국내에서는 마치 인디라는 명칭이 인기 없는 자들, 메이저에 올라가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거대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들, 자신의 일을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즐기기 위해 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다. 일본이나 미국에서는 인디 밴드들의 시장이 따로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물론 그쪽에서도 인디 시장은 [실험 시장]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인디는 인디대로 먹고 사는 게 가능하기 때문에 굳이 메이저로 올라가지 않으려는 사람도 많다. 한국은 안타깝게도 그게 무척 힘들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먹고 사는 것.

 

 때문에 직장인 밴드들이 상당히 늘었고 이들은 굉장한 실력을 보여준다. 하드코어 밴드인 [바세린]이 대표적이다. [바세린]은 멤버 모두가 직장인이다. 그런데도 이들의 음악을 들은 외국 메틀 레이블에서 미국 현지 투어 제의가 들어왔다. 무려 100회가 넘는 투어 제의를! [바세린] 멤버들은 모두 직장에 매여 있는 몸이어서 평소 존경하던 밴드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이 투어를 포기했다.

 

 

 인디 문화는 지역 문화로서의 역할도 한다. 한국은 수도에 인구가 너무 많이 집중되어 있다. 때문에 서울 코믹이나 부산 코믹은 있어도 대전 코믹, 대구 코믹, 울산 코믹은 없다. 지방에는 노인들만 많으니까. 앞으로도 출산율이 계속 떨어질 경우 이런 상황이 심화되면 심화되었지 완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반대로 미국이나 일본에는 깡촌에도 클럽이 있고 나름대로 음반 유통망이 있다. 때문에 지역에서 밴드를 결성한 후에 메이저 데뷔를 하고 전국적인 인기를 얻는 것도 가능하다. 한국에서는 인디 밴드를 하려고 해도 일단 서울로 가야만 한다. 지역에는 아예 공연할 공간이 없다. 관객도 없다. 서울처럼 사람 많은 곳에서도 인디 공연 보는 사람이 없는데 지방은 오죽 하겠는가.

 

 다행히도 지금은 인터넷이란 전세계적인 유통망이 있어서 상황이 약간 유리해진 편이다. [오지은] 같은 가수는 스스로 [사운드니에바]라는 레이블을 세우고 데뷔 음반을 제작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사람이 음반 제작비를 충당한 과정이다. 자신의 음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서 인터넷으로 예약 주문을 받았다. 음반을 만들지도 않은 상태에서. 누가 입금했겠냐고? 59명이 입금했고 184만원까지 모았다고 한다. (다행히 미국의 스튜디오에서 믹싱은 공짜로 해주었다.) 음반 제작 총 비용이 206만원 들었다고 하니 오지은의 전략은 성공한 셈이다. (http://blog.naver.com/ozee81/50013809499)

 

 인디란 이런 것이다. DIY. Do it yourself! 남이 해주길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해라. 책을 출판해주는 곳이 없다면 스스로 출판사를 차리면 된다. [화성의 공주]를 출판한 '기적의 책'이 이런 경우다. '기적의 책'은 전문 번역자의 도움을 받아 저작권이 만료된 작품을 출간했다. 표지와 책에 들어간 소개글은 독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책을 출간한 이유는 읽을 만한 책이 없어서. 답답해서 견디다 못한 독자가 자신의 손으로 아예 책을 만들어 낸 것이다.  (http://mirror.pe.kr/zboard/zboard.php?id=event&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37)

 

 음반을 내주는 사람이 없으면 스스로 레이블을 차리면 된다. 펑크에서는 이런 일이 흔하다. 한국 펑크 초기의 컴필레이션 앨범인 [3000 펑크]는 최악의 음질(정말 못 들어줄 수준이다.)과 엄청난 수록곡(29곡) 믿을 수 없는 가격(3000원)을 자랑했다. [스컹크 레이블] 사장인 원종희씨의 말을 들어보자.

 


 김작가: 럭스는 하드코어에서 활동하던 친구들과 함께 98년 스컹크 레이블을 만들었다. 그때만 해도 인디 레이블이 거의 없던 때였고, 있다 해도 최소한의 자본이나 시스템을 구축해야 가능한 줄 알았던 때였다. 그 때 스컹크는 기존 인디 레이블과의 교류도 없이 그야말로 순수하게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평크 소년들끼리 설립했다는 점에서 신선했다.

 

원종희: 앨범 내주는 데가 없다 보니까 우리끼리 내자 만든 게 스컹크였다. 위에서는 기획사 만들어서 지들끼리 지지고 볶고 하니까 거기 끼지 말고 우리끼리 지지고 볶자는 마음이었다. 하드코어에서 같이 하던 친구들이랑 시작해서 레이지 본 등이 껴서 '우리는 한 마음'이란 테이프를 냈다. 카세트 녹음기로 녹음해서 만든 테이프였다, 사실, 처음에는 레이블도 아니었다. 그런데 야금야금 하다 보니까 CD도 찍었으면 좋겠는데 그러려면 사업자 등록증 내야 하고, 또 그러려면 세금 내야 하고, 세금 내려면 바코드 찍어야 하고, 그러다 보니 이왕 이렇게 해놓은 게 유통도 해보고 싶고, 그 와중에 여기저기서 치이고 그러다보니 대안을 만들게 되고, 그래서 온라인 샵도 만들고 도매처도 생기고, 이렇게 야금야금 해나가는 게 재밌었다.

 

김작가: 스컹크 레이블에서 지금까지 몇 장의 앨범을 제작했나. 그리고 제일 보람있던 음반은 뭔가.

 

원종희: [우리는 한마음]부터 최근 럭스 라이브 앨범까지 15장을 냈다. 보람.. 음, 역시 3000 펑크가 최고였지. 보람 100%였다. 아직 고등학생일 때였다. 당시 활동하던 거의 모든 펑크 밴드가 참가했었다. 역시 녹음은 조악했지만 메이저 레코드 엿 먹으라는 생각으로 만들었다.

 

김작가: 엿 먹일 의도였다니, 어떤 점에서?

 

원종희: 이런 거다. cd 값이 만원 쯤 할 때였는데 너무 비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3000원에 찍어서 상도 다 어기겠다는 의도였다, 말도 안 되고 초 로파이로 만들었던 것도 잡지 보면 양복 입은 사람이 다리 꼬고 앉아서 '2년 동안 몇 억 들여 만들었고..'운운하는 게 꼴 보기 싫었다. 그래서 음악 하는 사람들끼리 뭔가 해보자, 해서 우리끼리 벌린 게 [3000 펑크]였다. 배추 값도 그러지 않나. 실제 농민들은 배추 하나에 30원 받고 트럭 운전사는 서울에서 3000원에 팔고, 슈퍼 아줌마들은 5000원에 사고, 배추 만드는 사람들은 농민들인데. 음악을 하는 건 밴드들인데 1만원의 가격에 팔리기까지는 뚱딴지 같은 사람들이 개입이 되니까. 이게 고2 때 생각이었다. 8년이 지나보니까 그 뚱딴지 같은 사람들이 뚱딴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김작가씨의 원종희씨 인터뷰 중, http://zakka.egloos.com/3220076-

 


 놀랍지 않은가. 고등학생 때 이미 자기 손으로 앨범을 만들었다. 물론 [3000 펑크]를 들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정말 끔찍하게 조악한 음질의 음반이다. 게다가 나중에 원종희씨가 고백하고 있듯이 무조건 자기 스스로 만든다고 해서 장땡이 아니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유통망이라는 건 쉽게 깨트릴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들의 기개는 감동적이다. 누군가 해주기를 바라면서 감나무 아래 입을 벌리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홍대만 돌아다녀 봐도 연예인을 꿈꾸는 밴드들이 가끔 있지만, 그들의 모습은 그저 가련할 뿐이다.

 

 펑크 키드들만 자신의 손으로 앨범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음향 기술이 매우 발전해서 집에서도 앨범을 손쉽게 만들 수 있고, 그 음질은 전문 스튜디오에서 만든 것과 (일반인이 들어서는)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다. 소설은 어떠한가. 인터넷이나 통신에 올려 놨더니 대박이 되더라는 얘기는 [귀여니], [이우혁], [이영도] 등의 경우로 이미 증명이 되었다. 인디는 인디로 머물지 않는다. 그들은 메이저가 될 수 있다. 물론 인디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시대는 바야흐로 인디를 원하고 있다. 누가 해주길 바라지도 말고, 기다리지도 마라. 당신 스스로 해라. 내 손으로 내 발로 직접 해라.

 

 참 아름답다, 아름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