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반인이 되고 싶었다. 일반인이란 거창한 게 아니다. 누구나 일반인 아닌가. 하지만 나는 그것이 되고 싶었다. 내가 일반인에 대한 동경을 가지게 된 것은 초등학교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일보인가 중앙일보인가에 아라비안 나이트가 연재된 적이 있었다. 야한 얘기도 많이 나오고 해서 어린 마음에 참 재미있게 봤다. 에피소드 형식으로 연재됐는데, 신밧드의 모험 이야기 차례였다. 그런데 시작부터 뭔가 이상하다. 노인으로 등장한 신밧드가 평범한 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평범하다. 그건 뭘까. 평범한 나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신밧드라고 하면 다들 잘 알듯이 여러차례의 모험으로 세계 일주를 한 사나이다. 그런데 그런 인물이 그냥 집에서 애들이나 키우고, 때되면 직장을 나갔다고 끝나면 집으로 돌아오는 그러한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이 좋다고 말하다니, 이것은 우월감을 다른 식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상당한 충격이었다. 아, 평범한 게 좋은 거구나. 그래. 진짜 평범해지는 건 어렵지. 생각해보라. 한 명의 인간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비범한 일을 겪을 수 있는지. 50년전만 해도 한국 국민의 대다수가 [전쟁]이란 걸 겪었다. 지금 우리는 전쟁이 일어난다면 어떨까하고 궁금해하는 정도이지만, 정말 전쟁이 일어나면 생각할 시간도 없이 다 뒈져버릴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건 어쩌면 [평범]한 불행이 아닐까. 결국 평범과 비범이란 숫자의 문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갑자기 부모님이 돌아가신다, 교통사고가 난다. 삼풍 백화점이 무너진다, 성수대교가 무너진다. 한국인이 겪을 수 있는 불행은 그 수가 많고 매우 다양하다. 불행을 한번이라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불행의 수는 늘어나고 종류는 다양해진다. 불행이란 매우 평범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전국민을 같은 수렁 속에 밀어넣는 전쟁은 평범한 불행의 극한이 아닐까. 물론 이런 얘기는 그냥 말장난에 불과하다. 불행에 평범하고 비범한 게 어디 있겠나. 개인에겐 모든 불행이 특별하지. 오늘 손톱을 깎다가 너무 많이 깎아서 살을 뜯긴 것도 특별하고 동생하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싸우다가 머리칼을 쥐어 뽑힌 것도 특별하다.
결국 내 논점의 문제는 인간의 평범함을 행복이 아니라 불행에 집중한 것이다. 그렇다. 인간은 행복할 때만이 평범함의 중요성 내지 즐거움을 논할 수 있다. 평범한 불행? 불행이란 평범하든 비범하든 괴롭고 끔찍한 것이다. 아라비안 나이트를 제멋대로 각색한 작가가 불행을 염두에 두고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평범함의 중요성에 대해 논했을 리가 없다.
이러한 생각은 지금에 와서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는 너무 어렸다. 그래서 단순히 아, 평범함이란 좋은 거구나. 나도 평범해져야겠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라고 해서 아, 나도 평범해져야 겠다 싶어서 평범하다면 불행이든 행운이든 상관없어 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평범해지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행복해지고 싶었던 것이다.
행복. 행복이란 무척 평범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린 나는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했단 말인가. 도대체 이유가 뭔가. 딱히 이유랄 것은 없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활동적인 아이는 아니었고 음울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감상적이었다. 책을 너무 많이 읽었고 집에만 너무 처박혀 있었다. 내가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딱히 대단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닐 것이다. 어린 아이들 특유의, 아 나는 불행해라는 별 이유도 없고 근거도 없지만 왠지 모르게 그럴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이러한 성향은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중2병이란 얘기가 돌 정도로, 사춘기의 아이들은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난 키가 작아서 불행해, 나는 연예인이 아니라서 불행해, 난 돈을 못 벌어서 불행해, 나는 형제가 없어서 불행해, 사춘기 아이는 자신이 불행하다는 생각을 즐기고, 우울을 양식으로 삼아 자라난다. 그것은 단지 호르몬 이상에서 오는, 발달 과정에서의 자연스런 심리 현상일 뿐이다. 중2병이라고 비웃지 마라. 당신도 그 나이 때는 그랬으리라. 모든 아이가 남이 들으면 웃을 만한 이상한 고민 거리를 가지고 있고, 그 아이에게는 그 고민이야말로 세계 평화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다. 사실 세계 평화보다 한 아이의 고민이 나는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각기 하나의 생명체이기 이전에 거대한 우주의 일부이고, 개개의 인간은 작은, 그러나 무한한 우주적 실체이다. 나는 모든 인간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어제 홍대 서점에서 만난 100kg은 나갈 듯한 거구의 여자도 아름답고, 프린지 페스티벌을 방해하던 늙은 노숙자 아저씨도 아름답고, 매일 찌질거리며 인터넷에 글을 쓰는 나도 무척 아름답다. 아름다움이란 결국 한정된 자원이어서 아무나 막 퍼가면 금방 고갈된다. 김태희나 전지현은 물론 아름답지만, 그들의 아름다움은 이미 앵꼬가 나서 아무도 그들을 진정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람에게는 각기 아름다움의 자원이 있고, 누구도 건드리지 않는, 건드리지 못하는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 나는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퍼져나갈 때, 거리를 걸으며 깔깔거리는 소녀와 소년들을 볼 때, 술에 취해 하늘을 올려다 볼 때 그들의 모든 아름다움이 세상에 편재해 있음을 느끼곤 한다.
그럴 때 느끼는 행복감이란 진정 평범한 것이다.
어쨌든 나는 날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특별한 게 아니다. 뭔가 특수하게 이상한 거다. 뛰어난 게 아니라 한참 모자란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열등감] 또한 사춘기 소년이 느낄 법한 당연한 감정이긴 하다. 하지만 내가 열등감을 느끼는 대상은 오 헨리 같은 작가이지, 결코 교실에서 인기가 많은 아이나 키가 크고 힘이 센 아이, 여자 친구가 있는 아이는 아니었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때문에 모든 작가들은 내 적수였다. 지금 와서는 필설로 형용하기에도 부끄러운 생각이 되어버렸지만, 그런 생각은 지금에 와서도 크게 변함이 없다. 나는 아직도 작가가 되고 싶고, 내 라이벌은 테드 창 정도다. 농담이 아니다. (농담이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 나도 변했다. 그렇게도 일반인 같은 생각을 하고 싶었고, 일반인 같은 행동을 하고 싶었는데, 알고 보니 나는 빼도박도 못할 일반인이었다. 이미. 예전부터. 어쩌면 태어났을 때부터. 나는 친구도 없고 말수도 없고 밖에도 안나가고 맨날 침대에 누워 멍하니 있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일본에는 그런 종류의 인간을 히키코모리라고 하고 몇 십 만명이나 있다지 않는가. 한국에도 점차 이런 종류의 인간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뭐야 트렌드였어?
나는 인생 최초로 나 자신도 유행을 따라가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나도 모르게 유행을 따라갔다. 본래 유행이란 그런 것이다. 그게 유행인지도 모르고 따라하게 되는 것. 나는 진부함이 싫었고 평범함을 거부하고 있었다. 마음 속으로는 간절히 평범해지고(행복해지고) 싶었지만, 나의 양가적 심리적 상태는 이 평범함을 거부했던 것이다.
언니네 이발관 5집, 가장 보통의 존재의 앨범 소개는 이런 문구로 시작한다.
이 앨범은
어느날
자신이 결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섬뜩한 자각을
하게된 어떤 사건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나는 이미 그런 자각을 겪었고, 이 시대를 사는 수많은 20대가 그러할 것이다. 사춘기가 그렇듯이 20대의 [자각]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다. 유사 이래 얼마나 많은 20대가 나와 같은 평범함에 대한 자각에 절망했을 것인가. 이 지겨운 [가장 보통의 존재]를 앞에 두고 얼마나 많은 젊은이가 술을 마시며 울었을 것인가.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셔대는가. (물론 그냥 철이 없어서 그런 거겠지만.) 나는 그들을 보듬어주거나 위로해주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누군가를 위로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에게 말하고 싶다.
원래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좀 있으면 다 뒈져버릴 때니까 기다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