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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청춘 찬가讚歌 - 나츠메 소세키의 ‘마음’과 루쉰의 ‘장명등’을 중심으로
돌아오지 못할 저 강물처럼 흘러간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아름다운 나의 청춘
-청춘, 뜨거운 감자 中-
http://blog.naver.com/lke56?Redirect=Log&logNo=10037153878
고통 속에 찢어진 꿈은
끓는 피에 녹아 있고
분노 속에 눈물을 삼킨
우린 살아있다
멈추지 않는 불안함을 가슴에 안고
잡지 못할 세월 앞에 아쉬운 청춘이 간다
-청춘이 간다, 럭스 中-
http://blog.naver.com/ekin218kr/130000895651
위에서 소개한 두 가지 청춘 찬가는 ‘럭스’라는 펑크밴드의 ‘청춘이 간다’와 ‘뜨거운 감자’라는 밴드의 ‘청춘’이란 노래이다. 이들의 노래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청춘을 노래한다. 럭스는 격렬하고 시끄러운 음악을 하는 밴드이다. 때문에 이들의 청춘이란 분노로 가득하다. 반면에 뜨거운 감자는 상대적으로 조용한 음악을 하는 밴드이다. 이들의 청춘은 아련하고 꿈결 같고 아쉬운 것이다. 도식적인 이해가 되겠지만, 소세키는 ‘뜨거운 감자’ 같다고 할 수 있고 루쉰은 ‘럭스’ 같다고 할 수 있다.
소세키는 조용하고 소심한 청년이다. 그는 들뜨는 일이 없다. 소세키의 어조는 대개 독백이고 회상이다. 그에 반해 루쉰은 열혈 청년이다. 곧잘 핏대를 올리고 목소리가 높아진다. 루쉰은 욕도 잘하고 연설도 즐긴다. 이러한 두 작가의 성향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작품으로 나는 ‘마음’과 ‘장명등’을 선택했다.
-소세키의 청춘
‘마음’의 주인공은 미래가 불확실한 청년이다. 청년이란 대개 미래가 불확실하기 마련인 것이다. 그의 미래는 소설에서 두 가지로 제시된다. 하나는 선생님이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다. 선생님은 지적이지만 인생의 패배자다. 아버지는 천박하지만 어엿한 가장이다. 주인공은 이 두 가지 길 중에서 선택할 것을 요구 받는다. 본래 인생이란 선택의 연속인 법이다. 주인공은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않고 선생님을 향해 떠난다. ‘나’는 아버지 대신 선생님을 선택했다. ‘마음’의 주인공이 ‘덜커덩거리는 삼등 열차’에 몸을 실은 순간, 그는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의미이다. 주인공에게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야 할 사회적 의무가 있다. 그럼에도 그것을 버리고 떠난 순간, 그에게 내려질 사회적 제약을 주인공은 기꺼이 짊어지고 갈 결심을 한 것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노예가 되기를 거부한다. 청춘이 여기서 종결을 고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청춘이 간다.
그런데 ‘마음’은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아버지와 선생님 같은 주변 인물의 이야기를 더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초반에서 주로 서술되는 건 선생님이고, 중반의 중심적 인물은 아버지다. 종반에서는 아예 선생님이 화자가 된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단순한 서술자로서 관찰자에 불과한가. 아니다. 선생님은 ‘나’다. 선생님의 과거는 ‘나’의 미래다. 이것은 논리적 비약으로 보이지만, 어째서 그가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주인공이 그 낯선 남자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없다. ‘내’가 해변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선생님으로써 나에 의해 선택되었다. 그의 선생님으로서의 존재 형태가 ‘나’에 의해 규정된 것이다. ‘내’가 그에게 ‘선생님’이라는 이름을 준 순간, 그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선생님’이 되었다.
선생님은 ‘나’의 힘으로 얻어낸 미래다. 그에 반해 아버지는 ‘나’에게 주어졌던 과거다. ‘내’가 열차를 타고 선생님에게 향하는 일종의 폐륜을 저지르는 것은 이미 예정된 일이나 마찬가지다. 선생님은 자신의 과거를 편지를 통해 보여준다. 이는 마치 수정 구슬을 통해 미래를 엿보는 것과 같다. 종반에서 화자가 교체되는 것이 내게는 서술자 간의 위치 교환이 아니라 통합이나 복원으로까지 보인다. 서술 대상을 ‘나’의 내면의 은유로 보는 관점은 아버지의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다. 주인공이 임종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아버지로써 표상되는 전통을 계승하지 않겠다는 의미로도 읽힐 수 있다.
선생님과 아버지는 각각 주인공의 내면 갈등의 두 축을 표상하고 있다. 안주安住와 도전, 과거와 미래, 인습과 혁신, 퇴행과 발전, 전근대와 근대, 성실과 나태, 천박과 우아. 아버지가 되겠는가. 선생님이 되겠는가. 아버지가 된다면 너에게는 아내와 자식과 사회적 인망과 신뢰가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그건 네가 마음속에서 가장 싫어하는 삶이겠지. 선생님이 된다면 지금껏 동경해오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하지만 네 마음속에는 자신만은 속일 수 없는 악몽이 싹트고야 말 것이다. 종국에는 너를 죽음으로 이끌고 마는 바로 그 고통스런 악몽이.
선택을 하지 않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소세키의 젊은이는 언제나 선택의 유보, 결정의 연기를 기도企圖한다. 소세키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 그는 끝없이 도피한다. 마치 ‘문’의 연인들처럼 겨울이 지나가기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겨울이 지나가도 그들에게 봄이란 없다. 그들에게 있어 봄이란 단지 새로운 겨울이 오기까지 기다리는 휴식기일 뿐이다. 소세키에게 있어 봄이란, 청춘靑春의 향기에 취해 발걸음을 멈추는 기간이다. 봄이 끝나고 여름이 오면 우리는 땀을 흘려야만 한다. 청춘이 끝나면 직장에 나가 하루의 밥을 벌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소세키는 그것이 정말로 싫다.
-루쉰의 청춘
루쉰의 ‘장명등’에 나오는 청년은 미쳤다. 그는 소리친다. “그 불을 꺼버려!” 여기에서의 불이란 인습, 부조리, 권위, 탐욕, 봉건사상, 반혁명 등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의 뒤에서 다시 “불을 지르겠어!” 라는 언급이 나오면서 불의 의미는 이중적이 된다. 불은 사회를 지탱하는 기반인 동시에 사회를 변혁하고 파괴할 수 있는 힘이다. 이는 마치 프로메테우스가 신에게서 훔쳐온 불처럼 인간에게 풍요를 가져오는 신화적인 의미에서의 불과 같다. 불은 지혜다. 그러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지혜다. 프로메테우스는 불의 대가로 자신을 바쳐야만 했다. 10개의 태양을 활로 쏘아서 떨어트린 예羿의 신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불은 인간을 위협한다. 우리는 불을 필요로 하지만 결국 꺼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집과 몸이 모조리 불타버릴 것이다.
청년은 불과 같다. 그의 가슴은 불타고 있다. 청년만이 불을 지를 수 있다. 시청 광장과 서울의 거리를 에워싼 촛불은 오롯이 청춘의 힘으로만 타올랐다. 단순히 나이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아니다. 혁명의 불길은 새롭고 힘찬 정신에서만 나온다. 모든 혁명은 젊은이의 혁명이다. 청춘은 혁명이다. 혁명은 시끄럽다. 혁명은 되도록이면 시끄러워야만 한다. 김수영이 말했듯이.
노란 꽃을 주세요 금이 간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하얘져가는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넓어져가는 소란을
-김수영, “꽃잎 2” 중 일부
“이 인용문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점은 ‘혼란은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자유당 때의 무기력과 무능을 누구보다도 저주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지만, 요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당시에도 자유가 없었지만, ‘혼란’은 지금처럼 이렇게 철저하게 압제를 받지 않은 것이 신통한 것 같다. 그러고 보면 ‘혼란’이 없는 시멘트 회사나 발전소의 건설은, 시멘트 회사나 발전소가 없는 혼란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러한 자유와 사랑으로서의 ‘혼란’의 향수가 문화의 세계에서 싹트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미미한 징조에 불과한 것이라 하더라도 지극히 중대한 일이다.”
- 김수영, “시여 침을 뱉어라”, 1968년 4월 부산에서 팬클럽 주최로 행한 문학 세미나에서의 발표 원고 중 일부
그러나 사회는 혼란을 허용하지 않으려 한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청년을 광인이라고 규정하고 낫기를 바라며 사당에 가둔다. 그럼에도 그는 결코 낫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아프지 않기 때문이다.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치지 않은 사람은 나을 수가 없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은 그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아니 알아야만 할 것이다. 청춘의 혼란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젊은 사람은 갈피를 못 잡고 마음만 앞선다. 눈앞에 보이는 목표로 단번에 달려가서 이루려고 한다. 가는 길에 얼마나 많은 장애물이 있는지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넘어지고 부서지고 피가 나고 눈물이 흐르지만 청춘은 멈추지 않는다. 가는 내내 혼란은 격심해지고, 극에 달했을 때, 그는 차라리 미치기를 바란다. 그러나 미치지 못하는 것이 바로 광증의 원인이다.
루쉰의 ‘광인일기’에서 주인공이 미칠 것처럼 두려운 것은 자신만이 홀로 제 정신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인육을 먹는 괴물들인데 그걸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뿐이다. 그는 어쩌면 미쳤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이 미쳤는데 자기 혼자 제정신인 것이 낫겠는가, 아니면 다 함께 미치는 것이 낫겠는가. 루쉰은 단호하게 말한다. 나는 광인이 되겠다고. 때문에 그의 청춘은 광증이다. 루쉰은 타협을 거부한다. 타협보다는 파괴가 좋다. 루쉰의 젊음이란 행동력이고 저돌성이다. 이제 촛불을 끄고 대신 시청에 불을 지르자.
-우리 모두의 청춘
소세키와 루쉰의 청춘은 얼핏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한 명은 조용하고 한 명은 시끄럽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젊은이는 부끄러워할 줄 알며, 또한 뻔뻔하고 대담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청춘이란 본래 모순된 것이다. 청춘이란 선택을 거부함으로써 선택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우리의 미未선택조차 하나의 선택이 된다. 바로 청춘을 버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청춘의 상실은 강요되는 것이다. 시간 이전에 사회에 의해, 나에 의해. 육체의 노화는 마음의 쇠락을 따라가지 못한다. 머리가 하얗게 세기 이전에 먼저 마음이 녹슬어 버린다. 그렇기에 젊은이는 영원히 정지하고 싶어 하지만 일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소세키식 해법은 연애다. 형수를 사랑하고,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고, 친구의 연인을 빼앗는다. 그러다 친구가 죽고 상처를 받으면 그 상처마저 청춘의 추억으로 삼는다. 선생님의 제물은 자신의 고독한 친구 K였다. 소세키의 연애란 죽음을 유예하는 유일한 방책이다. 타인을 불태우는 번제燔祭다.
루쉰식 해법은 혁명이다. 불을 지르고 인육을 먹는 자들을 고발한다. 늘어져 있는 아Q를 일으켜 세워 엉덩이를 뻥뻥 걷어찬다. 그의 목을 자르고 노래를 부르게 한다. 하지만 아Q는 결국 노래 한마디 부르지 못한다. 그러나 ‘장명등’의 아이들은 노래를 부른다. 아이들만이 진실을 노래할 줄 알기 때문이다.
“하얀 뜸배. 맞은편 언덕에서 잠시 쉬고,
지금 곧 끈다. 내가 끈다.
회문의 한 구절을 노래하네.
불을 질러버린다. 하하하!
불불불. 과자를 조금 먹고는,
회문의 한 구절을 노래하네.”
-루쉰, “루쉰 소설전집”, 김시준 역,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2, p.280,
나는 이것을 루쉰의 청춘 찬가라고 생각한다. 소세키는 루쉰의 노래를 관객석에서 눈을 감고 듣고 있다. 나는 침묵하는 소세키 또한 노래를 부르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왜냐하면 청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은 한결같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싶고 극복하고 싶고 바꾸고 싶고 머물고 싶다. 되는 것은 없고 무엇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은 밖으로 나가 거리를 걷고 싶다. 불을 지르고 싶다. 그러다 갇혀도 좋다. 사랑하는 그녀 혹은 그가 있다면 좋겠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좋다. 나의 고독, 고통, 사랑, 절망, 기쁨, 쾌감, 감동, 우울 - 그 모든 것이 오늘 밤 최고조를 달리고 있다. 나는 웃고 있다.
노래를 부르며, 우리 모두의 청춘을 노래하며.
2. 보편적인 노래 -나츠메 소세키의 ‘문조’와 염상섭의 ‘E선생’을 중심으로
나츠메 소세키의 장편은 매우 심상尋常하다. 제목부터 평범해서 ‘문’이니 ‘그 후’이니 하는 바람에 제목과 내용을 연결해서 기억하기가 쉽지가 않다. 자칫하면 ‘문’의 내용을 ‘마음’과 헷갈리거나 ‘그 후’의 내용을 ‘길위의 생’과 착각하기가 쉽다. 내용도 엇비슷한데다 이어지기까지 하니 선후의 관계를 따지다 보면 정신이 혼란스러워진다. 그에 반해 소세키의 단편은 상대적으로 강렬해서 기억하기가 쉽다. 그런데 ‘문조’만은 예외적이다. ‘몽십야’의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이미지와는 달리 지루하고 따분한 일상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문조’야말로 소세키의 장편 소설들이 추구하는 보편성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염상섭의 ‘E선생’은 소세키의 ‘문조’와 비슷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초기 3부작과는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강렬한 세 편의 단편으로 조선 문단에 출사표를 던진 청년 염상섭이 어째서 ‘E선생’처럼 심상한 필치의 작품을 내놓았을까. 노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보편적인 노래를 너에게 주고 싶어
이건 너무나 평범해서 더 뻔한 노래
어쩌다 우연히 이 노래를 듣는다 해도
서로 모른 채 지나치는 사람들처럼
-보편적인 노래, 브로콜리 너마저 中-
http://blog.naver.com/chamgae?Redirect=Log&logNo=120059818030
‘브로콜리 너마저’는 한국의 인디 밴드로, 1집 ‘보편적인 노래’로 세상에 정식으로 인사했다. 1집의 타이틀곡인 ‘보편적인 노래’는 그들의 음악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다가가기를 바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브로콜리 너마저’는 현란한 춤이나 야한 옷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려고 하지 않는다. 유자차처럼 항상 곁에 두고 즐길 수 있는 음악을 하고 싶어 한다.
소세키 또한 신문사의 전속 소설가가 되었을 때 품은 마음이 그랬을 것이다. 보편적인 일본 국민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소세키에게 보편성이란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이상적인 목표였다. 또한 영원히 이룰 수 없어서 그를 괴롭히는 한계였다. 보편적이라는 것은 천박하다는 것과는 다르다. 보편성이란 평생을 단 한 명의 사람과 같이 보내는 것 같은, 지루한 인생을 통해서만 성취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성을 획득할 기회가 주어지지만, 그것을 진정으로 추구하고 그것으로부터 만족을 얻는 이는 많지 않다. 보편적인 인간이 되는 것에는 부단한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세키는 소설을 쓰는 일 말고는 할 줄 아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소세키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문조’의 주인공은 새 한 마리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죽인다. 게다가 새의 죽음을 어린 하녀에게 돌리는 유아적인 행동까지 보이고 만다. 그는 어른이 되지 못한 것일까. 아니다. 사실 소세키는 엄청난 엘리트다. 국가의 명에 의해 영국 유학을 다녀온 그는 강사이긴 하지만 동경대에서 학문을 가르치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먹고 살 정도의, 존경을 받을 만큼의 지위는 보장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소세키가 글쟁이로 전락하고 만 것은 자의에 의한 것이었다. 마치 이상이 건축기사를 그만 두고 룸펜으로 자처한 것처럼 말이다. 이상은 골방에 틀어박혀 아내의 힘으로 먹고 살았다. 이상은 방탕아니까. 그러나 우리의 소세키는 너무도 소심해서 소설을 쓰는 일로 도피해야만 했다. 소심한 소세키는 차마 아내에게 일을 시킬 수는 없었다. (소세키와 ‘문조’의 주인공을 동일시하는 것은 적지 않은 위험성을 내포하지만 여기서는 그 위험성을 간과하기로 한다.)
소세키는 정말로 문조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런 척했던 것일까. 나는 소세키가 무능력을 동경했다고 생각한다. 소세키는 자신이 엘리트라는 사실을, 타인과 다른 우수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소세키의 명민한 두뇌는 자신의 우수성이란 허울에 불과함을 눈치 챘다. 인간이 만들어낸 거짓된 망령이 덧씌워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앨범은
어느날
자신이 결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섬뜩한 자각을
하게 된 어떤 사건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한국의 모던 록 밴드 ‘언니네 이발관’의 제 5집 “가장 보통의 존재”(2008) 앨범 소개 글
물론 내가 소세키의 실제 인식에 대해 아는 것은 아니다. 그가 신문 전속 소설가가 된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그의 절망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나는 인간 소세키에 대해서 하나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장편에서 반복되는 지식인의 절망감 모티프는 내게 그러한 생각을 들게 했다. 소세키는 자신에게 절망한 것이 아닐까. 자신의 지식과 성취를 조롱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내 아이만 다룰 수 없는 게 아니야. 내 부모님조차 다룰 기교를 갖질 못했어. 그뿐만 아니라 중요한 내 아내마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어. 이 나이가 되도록 학문을 한 덕분에 그런 기교를 배울 틈이 없었지. 지로. 어떤 기교는 삶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 같아."
"그래도 훌륭한 강의만 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모든 걸 보충하고도 남으니 괜찮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사정을 보아, 물러나려 했다. 그런데 형은 그만 둘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난 오로지 강의 준비만을 위해 태어난 인간이 아냐. 그러나 강의를 준비하고 책을 읽어야 하는 필요 때문에 정작 중요한 인간다운 기분을 인간답게 만족시킬 수 없게 되고 만 거야. 아니면 상대방이 만족시켜 줄 수가 없게 되고 만 거지."
소세키의 장편 소설 ‘행인’ 중 일부이다. ‘행인’에서 형인 이치로는 소세키의 분신이다. 대학교수인 그는 융통성 없는 인간이다. 또한 감정적으로 불안하다. 소세키가 신경쇠약에 걸린 것처럼 이치로는 의처증에 걸렸다. 그런데 이치로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광증의 원인을 학문에서 찾는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치로는 강의 준비만 하다가 보편적인 인간이 되지 못한 자신을 증오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동생과 아내의 부정을 의심하는 형편없는 인간이 된 자신을 싫어한다. 그가 이렇게 된 것은 가족 때문이다. (혹은 그렇게 믿고 있다.)
‘길위의 생’에서 겐조는 영국 유학에서 돌아와 피폐해진 가족의 생활 앞에 경악한다. 선진국인 영국에서 첨단의 교육을 받고 왔지만, 그 바람에 자신의 가족도 건사하지 못한 인간이 되었다. 돈이란 단지 물적 교환 가치가 아니다. 돈은 가족의 행복을 지켜주는 장벽이며, 일신의 편안함을 보장해주는 기반이다. 돈이 없다면 밥을 먹을 수 있는가. 세익스피어를 공부하더라도 돈은 있어야 한다. 겐조의 경악은 소세키의 경악과 일치한다. 생활을 꾸려나가기 위해서 돈에 집착하는 겐조의 모습에는 생활인으로서의 소세키가 투영되어 있다.
소세키는 영국 유학을 마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에 열중해야만 했다. 도쿄 제국대학에서 일주일에 6시간 강의를 했던 것만이 아니라, 제일 고등학교에서 일주일에 20시간 강의까지 하면서 일에 매달려야 했다. 이때부터 소세키는 신경쇠약 증세가 재발하여 고통을 겪게 된다. 물론 그가 신경쇠약에 빠진 것은 아내와의 불화도 한몫 했지만 결국 밥벌이를 해야 한다는 고통에서 나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행인’을 인용한 위의 문장에서도 볼 수 있듯이 소세키의 밥벌이란 바로 강의였다. 강의 때문에 소세키는 미쳐버렸고, 이를 치유하기 위해 소세키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나쓰메 소세키는 1907년 5월에 오오쿠라 서점에서 출판된 [문학론]이라는 저서의 [서] 부분에서 “귀국 후 나는 여전히 신경쇠약 때문에 광인이 되었다. 친척들 중에서조차 이것을 시인하는 것 같았다. (중략) 단지 신경쇠약으로 인해서 광인이 되었기 때문에 [고양이]를 초안하고, [양허집]을 출판하고, 또한 [우즈라카고]를 출판하고 있었음을 생각하면, 나는 신경쇠약과 광기에 대해서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해야 마땅하리라고 생각한다”고 적었다.
-권혁권, “나쓰메 소세키가 생애를 통해 느꼈던 불안 고찰”, 한국 일본 학회, 2006, p.176에서 재인용.
소세키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강의를 했고, 그것은 그에게 너무나 큰 부담이었다. 강의를 한다는 것은 학문에 열중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학문에 열중해온 인생이야말로 가족과의 관계를 소원하게 하고, 가족을 피폐하게 만든 주요 원인이 아니었던가. 책만 읽다가 인간 사이의 진정한 감정의 교류에 무지하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이제 다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학문 밖에 없다니, 이 얼마나 지독한 아이러니인가. 이러한 아이러니가 바로 소세키를 미치게 만들었고, 소설을 쓰게 했다. 소세키는 자신이 어째서 광증을 겪게 되었는지를 소설로 쓴다. ‘문조’에서 주인공이 죽인 새는 소세키가 잃어버린 것 - 가족, 애정, 인간관계, 꿈, 소박한 일상- 이다. 즉 보편성이다.
‘집안 식구들이 먹이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문조가 죽어버렸네. 내가 부탁도 하지 않은 물건을 새장 안에 집어넣지를 않나, 더욱이 먹이를 주어야 하는 의무도 이행하지 않은 것은 너무나 잔혹한 일이었다’등의 내용이었다.
-나쓰메 소세키, “몽십야”, 노재명 옮긴, 하늘연못, 2004, p.28
‘문조’에서 주인공은 새가 죽은 것이 가족 탓이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미치게 된 것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였다, 내 꿈을 스스로 죽이게 된 것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였다고 그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소세키는 결국 자신을 속이지 못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새를 죽인 건 새를 소홀하게 돌보았던 주인공 자신의 탓이다. 잘못을 가족에게 돌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 간접적으로는 가족에게 죄가 있을지 모른다. 어째서 내가 나의 꿈을 버리도록 방치했습니까. 어째서 당신들과 소원하도록 나를 놔두었습니까. 하고. 그러나 그것은 투정에 가깝다.
염상섭의 ‘E선생’의 주인공은 같은 선생임에도 이치로=소세키와는 고민의 층위가 다르다. E선생이 교육에 대해 대단한 이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은 이치로=소세키와 유사하다. E선생은 오히려 시험 제도에 대해 의문을 가지며 학교라는 시스템 자체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E선생은 언제든지 교사를 그만둘 수 있다는 점에서 소세키와는 다르다. E선생은 결혼을 하지 않았다.
이약이는 結局結婚問題에까지 끌어왓다. 속으로는 어떠케 米國이든지 獨逸까지는 갓다와야하겠다는 陰謀를가지고잇는 E先生으로는 이런소리를들을때마다 事實귀가압흐거니와, 어찌해야 이家庭의係累에서 벗어날지 코가맥맥하얏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에게는 결혼을 할 생각이 없다. E선생은 일상으로 편입되려는 의지가 전혀 없다. 학교의 일상적인 세계를 다룬 ‘E선생’의 주인공은 사실 가장 일상과는 대척되는 인물이다. 그는 선생이란 직책에 대한 욕심도 없다. 그저 그때그때의 감정에 충실할뿐이다. 그가 시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단지 잠시의 감상이 지시하는 대로 따른 결과이다. 평소에 대단한 사상이나 이념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때문에 E선생은 학생들이 시험을 거부하자 도리어 화를 내고 당황한다. 그에게는 책임감이란 것이 없다. 상황 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결말에서의 의문은 매우 순수하다.
집에서 가만히 들어누어 E先生은 생각하야보앗다.
“昌熙의 일이라든지, 學校의 이紛擾라든지결국 그罪가 누구에게 잇슬가”라고.
E선생은 정말로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모르고 싶은 것이다! E선생은 생활에 여유가 있다. 교사 일을 하지 않으면 당장 굶어죽을 처자식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돈이란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아직 일상의 고통 속에 편입될 준비가 되지 않았으며, 그럴 맘도 전혀 없다. 그는 사회가 강요하는 보편성이 싫다. 단지 일개 가장으로서 편입되기를 거부한다. 이러한 면모는 ‘除夜’에서는 결혼 제도 부정으로, ‘闇夜’에서는 룸펜들의 무의미한 연날리기 같은 생활로, ‘標本室의 靑게고리’에서는 문명에 대한 거부로 반복되어왔던 것이다. E선생은 학교라는 제도권 내에 있지만, 여전히 트릭스터다. 기도회에서 거침없이 폭탄발언을 하는 모습은 그의 트릭스터로서의 정체성을 증명한다.
소세키의 고뇌에 대한 염상섭식 대답은 이토록 직설적이다. 우린 아직 젊고, 우리의 청춘은 결혼이나 사회, 학교 같은 것들에 의해 더렵혀질 수는 없다. 좀 더 난장판을 벌여보자. 소세키가 보편성 속에 편입되기를 갈구했다면, 염상섭은 자신이 미래에 보편성의 표준이 될 것임을 확신했다. 염상섭은 말한다.
내가 보편성이다.
염상섭에게 계몽적인 사상이 없었던 것은 맞다. 그러나 그의 소설은 새로운 미래상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좀 더 많은 젊은이들이 자유와 혼란을 자신의 보편성으로 획득할 때에, 이 세상의 모든 청춘들이 ‘보편적인 노래’를 부르게 될 때, 그때야말로 진정한 개성이 주어질 것임을 믿은 것이다. 진정한 개성이란 종종 자살이나 광증 같은 파멸로 치닫기도 한다. 직장을 잃을 수도 있다. ‘E선생’에서처럼 학생들은 시험을 거부하고, 일제고사를 거부한 교사들은 파면을 당한다. 그러나, 그래도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아직 젊기 때문이다. 청춘은 청춘으로 남자. 괜히 결혼하니까 소세키처럼 전전긍긍하면서 살다가 신경쇠약이나 걸리잖아?
독재가 어떻고, 식민지 현실이 어떻고, 세계 평화가 어떻고 하는 어려운 얘기는 그만 두자. 나는 내 앞에 있는 그녀가 날 사랑하는지, 내가 위대한 소설을 쓸 수 있는지, 지금 바로 여기에 있는 나의 마음이 더 중요하다. ‘님을 위한 행진곡’은 그만 두자. 사랑에 대해서 노래하자. 좀 더 보편적이고 평범하고 흔하다 못해 하품이 나오는 것에 대해 얘기하자. 내가 죽여버린 문조와 어제 학교를 그만 둔 E선생을 위해서 노래를 부르자.
우리 모두 보편적인 노래를 부르자.
3. 걱정하는 것을 걱정하지 마. - 청춘의 보편성을 노래하세요.
나는 이번 학기를 보내면서 소세키라는 작가를 참 좋아하게 되었다. 그의 보편성에 반했다. 문장이 담백하고 사유는 깊다. 관계는 오묘하고 불안이 넓게 퍼져 있다. 소세키의 소설은 마치 청춘의 외줄타기처럼 불안하다. 그러한 불안함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나는 소세키가 서구 문명 비판이라든가 근대화 비판 같은 거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사상인 자기본위自己本位라거나 측천거사則天去私 같은 것은 그다지 어려운 얘기가 아니다. 내발적 근대화니 외발적 근대화이니 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다지 이념적인 인간이 아니다. 소세키는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행복하게 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의 날카로운 정신은 그것을 불가능하게 했고, 끊임없는 가족과의 불화, 밥벌이가 그를 힘들게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기본위는 ‘내 마음대로 살기’, 측천거사는 ‘될 대로 되어라’ 정도로 해석된다고 생각한다.
농담이 아니다.
루쉰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루쉰에게는 중국이란 낙후된 나라를 끌어올려야만 하는 대의가 있었으니까. 그는 어떻게든 장명등을 끄고 싶어서 투쟁을 기획하는 투사였다. 고독했다는 점에서는 소세키와 같지만, 루쉰의 고독은 비장미가 있는 것이었다. 루쉰은 고독을 원했다. 소세키가 고독을 증오했던 것과는 다르다. 소세키가 고독했던 것은 그것 말고 다른 방식의 삶을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루쉰이 고독했던 것은 앞으로 펼쳐질 싸움에 대비하기 위해 정신을 단련하는 단계였다. 고독할수록 루쉰은 강해졌다. 본래 강한 자는 고독하고, 고독하지 않으면 강해질 수도 없는 것이다. 소세키는 그에 반해 얼마나 약했는가. 소세키는 강해지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그저 평범한 가족의 일원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소세키에게 그것은 얼마나 이루기 힘든 꿈이었던가. 보편성이란 그에게 너무도 멀었다.
염상섭은 사실 말하기 조심스럽다. 내가 이번 학기에 읽은 것은 초기 3부작과 E선생 같은 아주 적은 부분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초기 단편에만 한정해서 이야기를 진행해보자면, 염상섭은 쾌락추구자다. 염상섭이야말로 자기본위의 화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루쉰의 행동력을 갖췄다. 염상섭은 소세키의 정신과 루쉰의 몸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이들을 아우르는 단어는 역시 청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정신은 누구보다도 젊다. 젊음은 불안하고, 화내고, 소리 지르고, 때리고, 쫓겨나고, 엉터리에, 대책도 없고, 생각도 모자란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젊은이들을 걱정하지 않는다.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청춘만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답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애인을 빼앗기고 자살한 친구도 젊고, 학교에서 쫓겨난 E선생도 아직 젊고, 사당에 갇혀 울부짖는 청년도 젊기 그지없다. 세상은 아직 젊다. 우주는 지금 청춘이다.
W&WHALE의 ‘R.P.G Shine’을 인용하며 이 글을 끝내기로 하겠다.
걱정하는 것을 걱정하지 마
Rocket Punch Generation
지루하게 선명하기보다는
흐릿해도 흥미롭게
http://blog.naver.com/k_lalala?Redirect=Log&logNo=150039292336
나는 청춘의 보편성을 확신하고 있다. 나는 날 걱정하지 않는다.
귀가 멀어버릴 때까지 음악을 듣고 싶다. 지금도 흘러가고 있는 나의 청춘을 노래하며.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