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속으로

『세계 호러 걸작선』1,2편에 이어 번역가 정진영이 세계 호러 단편 100선을 고르고 옮겼다. 100편의 호러 고전을 한 권에 담은 이례적인 시도로, 고전 호러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기회다. 브렘 스토커, 오 헨리...


이 책은..

나의 평가





선집만큼 출판사에게 편리한 아이템도 없다. 고만고만한 작가들을 모아놓은 후에 유명한 작가를 한 둘 끼워 넣으면 일정 판매부수는 보장된다. 독자 입장에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보는 동시에 새로운 작가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이건 한국이나 외국이나 적용되는 법칙이고 장르계에서도 역시 예외는 아니다. 장르 쪽에서의 선집 전통을 주워 섬기려면 199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테지만, 나라고 해서 그 당시부터 책을 읽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sf의 경우 선집으로 처음 입문한 독자가 많을 것이라는 점만은 확신할 수 있다.
도솔에서 나온 [세계 sf 걸작선] 시리즈는 지금까지 여러 독자로부터 회자되고 있다. 특히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홍인기 씨의 [세계 휴먼 sf 걸작선]은 수준 높은 작품 감식안과 매끄러운 번역, sf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합쳐진 훌륭한 결과물이다. 박상준씨가 번역한 [토탈호러]란 선집도 소장하고 있는데 역시 나름대로 읽을만한 선집이다.
2003년 말과 2004년 황금가지와 시공사에서 연달이 sf 선집을 출판한 적이 있다. 황금가지에서는 [오늘의 sf 걸작선]이란 제목으로 데이비드 하트웰의 선집을 출판했고, 시공사에서는 가드너 도조와가 편집한 선집을 [21세기 sf 도서관]이란 제목으로 출간했다. 두 선집은 [SF]를 표지 디자인에 동시에 사용하는등 마치 서로 짠 듯한 기획을 보여줬다. 하지만 우연일 거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시공사는 그 후에 그리폰 2기를 마무리하는 작품 두어개를 출판한 후에, 현재는 거의 장르 출판계에서 손을 뗐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하지만 황금가지는 그 후에도 선집 출판을 멈추지 않았다. 밀리언 셀러 클럽이란 브랜드를 통해 국내 작가들을 중심으로 한 선집 출간도 계속하고 있다.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이 그것인데 최근에 [거울]이라는 웹진을 통해 한국 판타지 문학 단편선을 출간 기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한국의 척박한 장르 시장의 토대를 다지려는 시도로 보인다. 독자들에게 생소하거나 아예 알려지지 않은 국내 작가를 소개하고, 국내 작가들에게는 등단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필자가 이번에 리뷰하려는 책을 출간한 책세상도 선집 출판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는 출판사이다. 아마 장르 독자들에게 책세상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출간한 것으로 익숙할 것이다. 책세상은 [메피스토]란 브랜드로 척 팔라닉의 여러 작품과 다른 작가의 SF 작품을 꾸준히 소개해온 곳이다. 선집에 관해서도 정진영의 번역을 통해 [세계 호러 걸작선]을 선보였고 2006년에는 [뱀파이어 걸작선]을 출간했다. 그리고 내가 이번에 다룰 [세계 호러 단편 100선]도 정진영의 번역으로 나온 책이다.
흥미로운 것은 시공사나 황금가지의 SF 선집의 경우 외국의 선집을 그대로 번역해 온 것인데, 정진영은 자신이 번역과 작품 선택까지 동시에 맡았다는 점이다. 즉 정진영은 평소에 외국의 호러 선집을 자주 읽고 있으며 그런 독서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호러 선집을 편집까지 해낸 것이다. 감탄이 나올만도 한 대목이지만, 실제로 읽어보니 결과물은 상당히 참담한 수준이었다. 이미 필자는 황금가지에서 [톨킨의 환상서가]란 이름으로 19세기, 20세기초의 환상 문학 선집을 읽은 경험이 있다. 이 선집의 작가는 [세계 호러 단편 100선]의 작가와 약간 겹치고 작품의 연대는 거의 엇비슷하다. 선집의 편집자는 고서적상이면서 톨킨 연구가였다. 때문에 아무래도 원전을 접할 기회가 많았는지 [독자성]이 돋보였다. [톨킨의 환상 서가]의 작품들을 선정한 기준은 오롯이 편역자인 더글러스 앤더슨의 것이고, 그는 자신의 기준에 따라 얼마든지 원전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정진영의 경우 아무리 좋게 봐도 외국 호러 선집의 열렬한 독자일 수는 있으나 선집을 뛰어넘어 원전에 접근할 수 있는 실력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작품 소개를 보면 이 작품은 외국의 호러 선집에 자주 실린다는 문구를 너무도 빈번히 볼 수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보건대 정진영은 자신이 평소에 탐독하던 호러 선집을 짜깁기 하는 선에서 [세계 호러 단편 100선]을 편역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물론 필자는 호러에 대해 매우 무지하고 외국 호러 선집이라면 원문 독해가 불가능한 관계로 읽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오랫동안 장르와 책을 읽어온 한 명의 독자로서 유추를 통해 짚어내고 있다.
내 주장은 별로 근거도 없고 신빙성도 없다는 얘기다. 인터넷에 떠도는 얘기가 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100편이나 되는 작품을 일일히 원전 - 호러 선집이 아니라 작가의 전집이나 본래 작품집 - 을 다 읽은 후에 선별했다는 것은 도무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원전에서 길어 올린 작품은 기껏해야 10작품 이내를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본다. 비 영미권 작품의 경우나 유명 작가의 호러적 성향의 작품의 경우에는 특정 호러 선집- 비 영미권 호러 작품을 소개하는 선집이나 유명 작가의 호러적 성향 작품을 모은 선집에서 가져왔을 확률이 아주 높다. 고딕이나 유령 소설 계보의 작품들은 번역자의 개인 취향이 일부 개입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것 또한 유령 소설, 고딕 소설 선집에서 가져왔을 확률이 매우 높다고 본다.
필자가 이 책을 읽고 실망한 것은 정진영의 작품을 선정하는 과정이 2차적이라는 점 때문만이 아니다. 결정적으로 이 선집에 실린 작품들은 대부분 재미도 없고 작품 수준이 매우 낮다. 완결되지 않은 작품도 있고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민담을 필사한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거나, 당시 유령 소설의 공식을 너무나 충실하게 답습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이 선집에 실린 작품은 세 가지 정도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찰스 디킨스, 버지니아 울프 같은 유명한 순수 작가의 호러적인 성향이 있는 작품, 다른 하나는 러브 크래프트나 헨리 라이더 해거드 같은 유명한 장르 작가의 호러적인 성향이 있는 작품, 마지막으로 하나는 19세기, 20세기 초에 유행한 유령 소설, 고딕 소설의 공식을 충실하게 따라가고 있는 매우 낯선 작가들의 작품이다.
먼저 유명한 순수 작가의 작품의 경우 모파상, 버지니아 울프, 마크 트웨인 등 쟁쟁한 이름을 들먹이고 있긴 하나, 물론 재기 넘치는 작품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나, 대부분 작가의 이름값보단 못한 작품들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 작가들은 본래 호러 소설이나 고딕 소설을 전문적으로 쓴 작가들도 아니고, 그들 작품 중에서 장르 성향의 작품이 유명한 것도 아니다. 단지 유명하지 않다거나 비전문적인 차원이라는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작품 수준이 낮기 때문에 주목받지 못한 것이라는 판단이 가능하다. 즉 편역자는 유명 작가의 이름을 그저 빌려올 뿐, 과연 그 작품이 유명 작가의 작품 성향에서 얼마나 벗어나며 그 벗어나는 정도가 과연 작품 자체의 수준을 결정지을 정도인가에 대한 고민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번째로 유명한 장르 작가의 호러적인 성향이 있는 작품들은 그럭저럭 읽을만 하긴 했다. 그러나 그 작가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에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이유는 선집이 100편을 실으려는 과욕을 부리는 바람에, 또한 정진영의 작품 선택 범위가 원전이 아니라 또 다른 호러 선집에만 한정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아서 코난 도일의 경우에는 심령학 단편을 소개했다. [안개의 땅]을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아무리 유명 작가라고 해도 형편 없는 작품을 쓸 수 있다는 가장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코난 도일은 아무래도 죽기 전에 상당한 문학적 노망에 걸려 있었던 모양이다. 때문에 자신의 심령학적 광신을 소설에도 적용하여 독자에게 유령의 존재를 어떻게 하든 믿게 하려고 노력한다. 이는 그의 홈즈 시리즈에서 우리가 경험한 이성에 대한 신봉으로부터 완전히 배치되는 일이기에 매우 실망스럽다. 러브 크래프트의 [아웃사이더]는 중간 정도는 되는 단편이었으나 그의 우주적인 공포를 엿보기에는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헨리 라이더 헤거드의 [한갓 꿈] 또한 종잡을 수 없고 애매한 유령 소설의 특질을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긴 하나, 딱 거기까지다. 읽고 나서 애매하고 모호한 공포를 경험하고 싶다면 선집의 다른 작품들이 더 훌륭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으니 굳이 그의 단편을 탐독할 필요는 없다.
마지막으로 유령 소설, 고딕 소설의 계보를 잇는 작품들은 가끔 훌륭한 작품도 있었음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대부분 공포스러운 경험이 알고 보면 꿈이었고 잠자리 근처에는 그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임을 알려주는 증거물이 있었다라는 단순한 패턴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유령 소설의 경우 매우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특징인 것 같은데, 이것이 정진영의 번역 문제인지 아니면 소설 자체에 내재된 문제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 책을 읽는 내내 나를 괴롭혔다. 일단 이 선집에 실린 작품들은 대부분 19세기나 20세기 초에 출간되어 현재는 저작권이 소멸된 작품들이다. (여기에 출판사가 저작권료를 아끼려는 마음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영어가 언어학적인 변화가 적다고 하더라도 당시 작품들은 현재의 영어와는 매우 다를 것이 틀림없고, 유령 소설이나 고딕 소설의 장르적 특질을 감안할 때 (당시 기준으로 보아도.) 문장이 매우 고풍스러운 건 당연하다.
이 선집의 소설들은 오래되었기 때문에, 문장이 과거의 것이라서 비 전문가인 정진영씨의 번역으론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데다, 장르의 특질 상 문장을 부러 복잡하고 고답적이고 고풍스럽게 쓴 감이 있어서 이중으로 이해하기가 힘들다. 정진영씨가 번역을 많이 해 온 분이고 신인 문학상을 받을 정도로 소양이 있는 분이기는 하지만, 애초에 정진영씨는 19세기, 20세기초 영미 문학에 대한 전문가도 아닌데다가 그가 감당하기에는 이 선집의 작가들이 너무나도 쟁쟁하다. 버지니아 울프의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인 [흉가]는 짧은 작품이긴 하지만 사실 어떤 번역자에게도 벅찬 상대이다.
일단 문장을 이해하기도 힘들고 이 선집의 작품들은 내용도 매우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아서 읽기가 힘들다. 게다가 정작 읽고 나면 그다지 무섭지도 않거나 너무도 위악적인 소재 - 존속살해 같은 것을 남발하거나 유령의 일상적 존재를 확신시키려 노력하는 여고 괴담식 공포 수준인 경우가 많다.
전체적으로 평가하자면 편역자나 출판사나 너무 과욕을 부린 것 같다. 분량도 무려 980쪽에 달하기에 도무지 심심할 때 읽는 소설책으로서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 무조건 합본을 한다고 해서 좋은 게 아니라는 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합본의 경우로도 알 수 있다. 본래 분권으로 내야 맞는 소설책을 합본할 경우 들고 읽는 것이 불가능할 뿐더러, 거의 엽편에 가까운 짧은 분량의 소설을 모아 놓은 이 책의 경우에는 치명적이기까지 한 단점으로 작용한다.
본질적으로 보자면 애초에 정진영씨에게 작품 선택권까지 맡긴 것이 잘못이라고 본다. 정진영씨가 얼마나 능력이 있든지 간에 한국이나 외국이나 통틀어서 100편이나 되는 호러 단편 선집을 훌륭하게 기획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더구나 아무리 봐도 원전에는 접근이 불가능하고 (아예 불가능하다는 건 아니다.) 또 다른 선집의 짜깁기 수준(원전에서 가져온 것도 물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에만 그치는 사람에게 이렇게 거대한 책(물리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의 기획까지 맡긴 건 난센스다.
그리고 선집에 삽입된 삽화의 경우 매우 화질이 안좋아서 무슨 그림인지 알아 볼 수도 없고, 어떻게 본문에 어울리는 그림을 끼워맞추긴 했으나,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인터넷에서 퍼 온 퀄리티 낮은 싸구려 이미지 파일을 붙여넣기한 것으로밖에 안 보인다. 이럴 거면 아예 넣지 않는 것이 나을 뻔했다. 속이 훤히 다 들여다 보인다. 잘 보면 픽셀이 다 튈 정도다.
선집의 이름은 [세계 호러 단편 100선]이긴 하지만 사실 영미권 호러 단편 100선이다. 러시아 작가나 프랑스, 체코 등의 작가가 섞여 있으나 작품 수로 보나 작품 성향을 보나 영미권 호러 단편선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직하다. 게다가 영어 전공자인 편역자가 중역을 했을 것이 분명한데, 중역이 왜 문제가 되는지는 여기서 굳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지 않겠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아무래도 필자가 이 책을 너무 혹평한 것 같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괜찮은 단편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오컬트의 대가 알레이스터 크로울리의 단편을 볼 수 있다는 건 이 선집의 큰 장점이다. 19세기 유령 소설, 고딕 소설의 편린을 엿볼 수 있다는 것도 매우 유익한 측면이다. 빌리에 드릴라당의 [희망의 고문]이나 윌라 캐더의 [법정의 자비], 안톤 체호프의 [잠꾸러기] 같은 작품들은 충분히 일독할만한 가치가 있다. 100편이나 되는 단편을 모아놓았기 때문에 전부 다 쓰레기만 있는 건 당연히 아니다.
이것이 선집의 좋은 점이다.
도솔에서 나온 [세계 sf 걸작선] 시리즈는 지금까지 여러 독자로부터 회자되고 있다. 특히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홍인기 씨의 [세계 휴먼 sf 걸작선]은 수준 높은 작품 감식안과 매끄러운 번역, sf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합쳐진 훌륭한 결과물이다. 박상준씨가 번역한 [토탈호러]란 선집도 소장하고 있는데 역시 나름대로 읽을만한 선집이다.
2003년 말과 2004년 황금가지와 시공사에서 연달이 sf 선집을 출판한 적이 있다. 황금가지에서는 [오늘의 sf 걸작선]이란 제목으로 데이비드 하트웰의 선집을 출판했고, 시공사에서는 가드너 도조와가 편집한 선집을 [21세기 sf 도서관]이란 제목으로 출간했다. 두 선집은 [SF]를 표지 디자인에 동시에 사용하는등 마치 서로 짠 듯한 기획을 보여줬다. 하지만 우연일 거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시공사는 그 후에 그리폰 2기를 마무리하는 작품 두어개를 출판한 후에, 현재는 거의 장르 출판계에서 손을 뗐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하지만 황금가지는 그 후에도 선집 출판을 멈추지 않았다. 밀리언 셀러 클럽이란 브랜드를 통해 국내 작가들을 중심으로 한 선집 출간도 계속하고 있다.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이 그것인데 최근에 [거울]이라는 웹진을 통해 한국 판타지 문학 단편선을 출간 기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한국의 척박한 장르 시장의 토대를 다지려는 시도로 보인다. 독자들에게 생소하거나 아예 알려지지 않은 국내 작가를 소개하고, 국내 작가들에게는 등단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필자가 이번에 리뷰하려는 책을 출간한 책세상도 선집 출판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는 출판사이다. 아마 장르 독자들에게 책세상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출간한 것으로 익숙할 것이다. 책세상은 [메피스토]란 브랜드로 척 팔라닉의 여러 작품과 다른 작가의 SF 작품을 꾸준히 소개해온 곳이다. 선집에 관해서도 정진영의 번역을 통해 [세계 호러 걸작선]을 선보였고 2006년에는 [뱀파이어 걸작선]을 출간했다. 그리고 내가 이번에 다룰 [세계 호러 단편 100선]도 정진영의 번역으로 나온 책이다.
흥미로운 것은 시공사나 황금가지의 SF 선집의 경우 외국의 선집을 그대로 번역해 온 것인데, 정진영은 자신이 번역과 작품 선택까지 동시에 맡았다는 점이다. 즉 정진영은 평소에 외국의 호러 선집을 자주 읽고 있으며 그런 독서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호러 선집을 편집까지 해낸 것이다. 감탄이 나올만도 한 대목이지만, 실제로 읽어보니 결과물은 상당히 참담한 수준이었다. 이미 필자는 황금가지에서 [톨킨의 환상서가]란 이름으로 19세기, 20세기초의 환상 문학 선집을 읽은 경험이 있다. 이 선집의 작가는 [세계 호러 단편 100선]의 작가와 약간 겹치고 작품의 연대는 거의 엇비슷하다. 선집의 편집자는 고서적상이면서 톨킨 연구가였다. 때문에 아무래도 원전을 접할 기회가 많았는지 [독자성]이 돋보였다. [톨킨의 환상 서가]의 작품들을 선정한 기준은 오롯이 편역자인 더글러스 앤더슨의 것이고, 그는 자신의 기준에 따라 얼마든지 원전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정진영의 경우 아무리 좋게 봐도 외국 호러 선집의 열렬한 독자일 수는 있으나 선집을 뛰어넘어 원전에 접근할 수 있는 실력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작품 소개를 보면 이 작품은 외국의 호러 선집에 자주 실린다는 문구를 너무도 빈번히 볼 수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보건대 정진영은 자신이 평소에 탐독하던 호러 선집을 짜깁기 하는 선에서 [세계 호러 단편 100선]을 편역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물론 필자는 호러에 대해 매우 무지하고 외국 호러 선집이라면 원문 독해가 불가능한 관계로 읽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오랫동안 장르와 책을 읽어온 한 명의 독자로서 유추를 통해 짚어내고 있다.
내 주장은 별로 근거도 없고 신빙성도 없다는 얘기다. 인터넷에 떠도는 얘기가 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100편이나 되는 작품을 일일히 원전 - 호러 선집이 아니라 작가의 전집이나 본래 작품집 - 을 다 읽은 후에 선별했다는 것은 도무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원전에서 길어 올린 작품은 기껏해야 10작품 이내를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본다. 비 영미권 작품의 경우나 유명 작가의 호러적 성향의 작품의 경우에는 특정 호러 선집- 비 영미권 호러 작품을 소개하는 선집이나 유명 작가의 호러적 성향 작품을 모은 선집에서 가져왔을 확률이 아주 높다. 고딕이나 유령 소설 계보의 작품들은 번역자의 개인 취향이 일부 개입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것 또한 유령 소설, 고딕 소설 선집에서 가져왔을 확률이 매우 높다고 본다.
필자가 이 책을 읽고 실망한 것은 정진영의 작품을 선정하는 과정이 2차적이라는 점 때문만이 아니다. 결정적으로 이 선집에 실린 작품들은 대부분 재미도 없고 작품 수준이 매우 낮다. 완결되지 않은 작품도 있고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민담을 필사한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거나, 당시 유령 소설의 공식을 너무나 충실하게 답습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이 선집에 실린 작품은 세 가지 정도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찰스 디킨스, 버지니아 울프 같은 유명한 순수 작가의 호러적인 성향이 있는 작품, 다른 하나는 러브 크래프트나 헨리 라이더 해거드 같은 유명한 장르 작가의 호러적인 성향이 있는 작품, 마지막으로 하나는 19세기, 20세기 초에 유행한 유령 소설, 고딕 소설의 공식을 충실하게 따라가고 있는 매우 낯선 작가들의 작품이다.
먼저 유명한 순수 작가의 작품의 경우 모파상, 버지니아 울프, 마크 트웨인 등 쟁쟁한 이름을 들먹이고 있긴 하나, 물론 재기 넘치는 작품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나, 대부분 작가의 이름값보단 못한 작품들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 작가들은 본래 호러 소설이나 고딕 소설을 전문적으로 쓴 작가들도 아니고, 그들 작품 중에서 장르 성향의 작품이 유명한 것도 아니다. 단지 유명하지 않다거나 비전문적인 차원이라는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작품 수준이 낮기 때문에 주목받지 못한 것이라는 판단이 가능하다. 즉 편역자는 유명 작가의 이름을 그저 빌려올 뿐, 과연 그 작품이 유명 작가의 작품 성향에서 얼마나 벗어나며 그 벗어나는 정도가 과연 작품 자체의 수준을 결정지을 정도인가에 대한 고민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번째로 유명한 장르 작가의 호러적인 성향이 있는 작품들은 그럭저럭 읽을만 하긴 했다. 그러나 그 작가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에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이유는 선집이 100편을 실으려는 과욕을 부리는 바람에, 또한 정진영의 작품 선택 범위가 원전이 아니라 또 다른 호러 선집에만 한정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아서 코난 도일의 경우에는 심령학 단편을 소개했다. [안개의 땅]을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아무리 유명 작가라고 해도 형편 없는 작품을 쓸 수 있다는 가장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코난 도일은 아무래도 죽기 전에 상당한 문학적 노망에 걸려 있었던 모양이다. 때문에 자신의 심령학적 광신을 소설에도 적용하여 독자에게 유령의 존재를 어떻게 하든 믿게 하려고 노력한다. 이는 그의 홈즈 시리즈에서 우리가 경험한 이성에 대한 신봉으로부터 완전히 배치되는 일이기에 매우 실망스럽다. 러브 크래프트의 [아웃사이더]는 중간 정도는 되는 단편이었으나 그의 우주적인 공포를 엿보기에는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헨리 라이더 헤거드의 [한갓 꿈] 또한 종잡을 수 없고 애매한 유령 소설의 특질을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긴 하나, 딱 거기까지다. 읽고 나서 애매하고 모호한 공포를 경험하고 싶다면 선집의 다른 작품들이 더 훌륭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으니 굳이 그의 단편을 탐독할 필요는 없다.
마지막으로 유령 소설, 고딕 소설의 계보를 잇는 작품들은 가끔 훌륭한 작품도 있었음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대부분 공포스러운 경험이 알고 보면 꿈이었고 잠자리 근처에는 그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임을 알려주는 증거물이 있었다라는 단순한 패턴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유령 소설의 경우 매우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특징인 것 같은데, 이것이 정진영의 번역 문제인지 아니면 소설 자체에 내재된 문제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 책을 읽는 내내 나를 괴롭혔다. 일단 이 선집에 실린 작품들은 대부분 19세기나 20세기 초에 출간되어 현재는 저작권이 소멸된 작품들이다. (여기에 출판사가 저작권료를 아끼려는 마음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영어가 언어학적인 변화가 적다고 하더라도 당시 작품들은 현재의 영어와는 매우 다를 것이 틀림없고, 유령 소설이나 고딕 소설의 장르적 특질을 감안할 때 (당시 기준으로 보아도.) 문장이 매우 고풍스러운 건 당연하다.
이 선집의 소설들은 오래되었기 때문에, 문장이 과거의 것이라서 비 전문가인 정진영씨의 번역으론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데다, 장르의 특질 상 문장을 부러 복잡하고 고답적이고 고풍스럽게 쓴 감이 있어서 이중으로 이해하기가 힘들다. 정진영씨가 번역을 많이 해 온 분이고 신인 문학상을 받을 정도로 소양이 있는 분이기는 하지만, 애초에 정진영씨는 19세기, 20세기초 영미 문학에 대한 전문가도 아닌데다가 그가 감당하기에는 이 선집의 작가들이 너무나도 쟁쟁하다. 버지니아 울프의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인 [흉가]는 짧은 작품이긴 하지만 사실 어떤 번역자에게도 벅찬 상대이다.
일단 문장을 이해하기도 힘들고 이 선집의 작품들은 내용도 매우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아서 읽기가 힘들다. 게다가 정작 읽고 나면 그다지 무섭지도 않거나 너무도 위악적인 소재 - 존속살해 같은 것을 남발하거나 유령의 일상적 존재를 확신시키려 노력하는 여고 괴담식 공포 수준인 경우가 많다.
전체적으로 평가하자면 편역자나 출판사나 너무 과욕을 부린 것 같다. 분량도 무려 980쪽에 달하기에 도무지 심심할 때 읽는 소설책으로서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 무조건 합본을 한다고 해서 좋은 게 아니라는 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합본의 경우로도 알 수 있다. 본래 분권으로 내야 맞는 소설책을 합본할 경우 들고 읽는 것이 불가능할 뿐더러, 거의 엽편에 가까운 짧은 분량의 소설을 모아 놓은 이 책의 경우에는 치명적이기까지 한 단점으로 작용한다.
본질적으로 보자면 애초에 정진영씨에게 작품 선택권까지 맡긴 것이 잘못이라고 본다. 정진영씨가 얼마나 능력이 있든지 간에 한국이나 외국이나 통틀어서 100편이나 되는 호러 단편 선집을 훌륭하게 기획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더구나 아무리 봐도 원전에는 접근이 불가능하고 (아예 불가능하다는 건 아니다.) 또 다른 선집의 짜깁기 수준(원전에서 가져온 것도 물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에만 그치는 사람에게 이렇게 거대한 책(물리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의 기획까지 맡긴 건 난센스다.
그리고 선집에 삽입된 삽화의 경우 매우 화질이 안좋아서 무슨 그림인지 알아 볼 수도 없고, 어떻게 본문에 어울리는 그림을 끼워맞추긴 했으나,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인터넷에서 퍼 온 퀄리티 낮은 싸구려 이미지 파일을 붙여넣기한 것으로밖에 안 보인다. 이럴 거면 아예 넣지 않는 것이 나을 뻔했다. 속이 훤히 다 들여다 보인다. 잘 보면 픽셀이 다 튈 정도다.
선집의 이름은 [세계 호러 단편 100선]이긴 하지만 사실 영미권 호러 단편 100선이다. 러시아 작가나 프랑스, 체코 등의 작가가 섞여 있으나 작품 수로 보나 작품 성향을 보나 영미권 호러 단편선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직하다. 게다가 영어 전공자인 편역자가 중역을 했을 것이 분명한데, 중역이 왜 문제가 되는지는 여기서 굳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지 않겠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아무래도 필자가 이 책을 너무 혹평한 것 같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괜찮은 단편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오컬트의 대가 알레이스터 크로울리의 단편을 볼 수 있다는 건 이 선집의 큰 장점이다. 19세기 유령 소설, 고딕 소설의 편린을 엿볼 수 있다는 것도 매우 유익한 측면이다. 빌리에 드릴라당의 [희망의 고문]이나 윌라 캐더의 [법정의 자비], 안톤 체호프의 [잠꾸러기] 같은 작품들은 충분히 일독할만한 가치가 있다. 100편이나 되는 단편을 모아놓았기 때문에 전부 다 쓰레기만 있는 건 당연히 아니다.
이것이 선집의 좋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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