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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책/오늘 읽은 판타지

바람을 본 소년, C.W. 니콜

 

 간단하게 읽을 수 있는 동화다. 작가의 매우 특이한 이력이 눈에 띈다. 작가는 본래 영국인인데 캐나다로 이주해서 해양 포유류를 연구하다가, 현재는 일본인으로 귀화하여 일본에서 살고 있다. 이 작품도 일본어로 집필되었다. [바람을 본 소년]은 일본에서 출판된 작품답게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줄거리만 봐도 소설과는 동떨어진 내용이다. 애니메이션이 어린이를 위한 활극이라면 [바람을 본 소년]은 작가의 개인적인 철학을 내세운 문명 비판 동화다.

 

 [바람을 본 소년]은 이름이 없다. 부모도 알 수 없고 애초에 인간이 맞는지도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소년은 바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비유적인 문장이 아니다. 말 그대로 소년은 바람을 [볼 수] 있고 때문에 하늘을 날아다닌다. 쉽게 말하겠다. 소년은 초능력자다. 이 소년은 다분히 야마시타 카즈미의 [불가사의한 소년]을 연상하게 한다. [불가사의한 소년]은 이름이 없고 신과 같은 능력을 가졌다. 그는 시간을 뛰어넘으며 인간의 문제를 해결한다. (물론 문제를 만들기도 한다.) 정말로 야마시타 카즈미가 이 소설로부터 모티프를 얻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둘의 유사성이 흥미로운 건 사실이다.

 

 소년은 소녀만큼이나 신비로운 존재다. 아직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존재이면서도 어른의 속내를 간파하고 해결책까지 제시한다. [바람을 본 소년]은 혁명 전사이기까지 하다. 이 작품은 동화풍이면서도 사람이 죽는 장면을 그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초반에 나오는 바람을 본다느니, 개미의 집을 부숴서 안타깝다느니하는 장면과는 엄청난 괴리가 있다. 정부는 독재자에 의해 지배되었고 전쟁을 일삼는다. 그들은 아무리 봐도 나치를 연상하게 하고 그들의 팽창 욕구는 일본의 군국주의와도 맞닿아있다.

 

 군인은 권총으로 맘에 들지 않는 자를 쏴 죽인다. 혁명을 기도하는 세력들은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정부 요인을 습격한다. 소년은 총탄이 날아드는 상황 속에서 울부짖는다. 그뿐인가. 소년은 엄마 곰과 동생 곰 - 진짜 곰이다. - 과 잘 지내다가도 문명에 깃든 폭력성을 성찰한다. 소년은 이야기 형식으로 문명이 싹트던 시대의 얘기를 듣는다. 얘기 속에서는 두 종류의 원시인이 등장한다. 하나는 자연과 합일되어 곰과 친구로 지내는 동굴족이고 다른 하나는 정복을 원하는 황금용 부족이다. 이들이 격돌하여 마침내 자연과 관계가 단절되는 과정은 서양 문명에 내재된 폭력성을 근원적으로 비판하는 듯하다.

 

 이 황금용 부족의 후예가 독재 국가의 국민들이고, 이들이 만든 거대한 비행선과 레이저 무기, 원자폭탄(!)은 세계를 위협한다. 전형적인 문명 비판임을 짐작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문명 비판이 어디까지나 동화의 틀 안에서 진행된다는 점이다. 소설은 시종일관 환상적인 분위기이다. 소년이 고민하는 것은 자신 때문에 집을 잃은 족제비를 위해 새로운 돌을 찾는 일이다. 소년은 바라보기만 해도 물체를 파괴할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소년은 혁명에 참여하여 총탄에 쓰러질지언정 사람에게 이 능력을 사용하진 않는다. 소년은 죽어서도 영혼이 되어 계속 소설에 등장한다. 그 다음은 신비주의적인 묘사가 이어진다.

 

 소설이 보여주는 이러한 불균형이 바로 매력이다. 한쪽에선 개미의 집을 걱정하고 다른 쪽에선 민족주의에 빠져 세계정복 욕망에 불타는 국민국가를 비판한다. 소설 전체를 아우르는 건 자연에 대한 작가의 애정어린 시선이다. 현대 문명을 비판하는 환경주의적인 관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소설은 동화로 남는다. 이런 동화는 결코 흔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