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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책/오늘 읽은 판타지

얌전한 레슬러, 프란츠 카프카 외

   최근에 들어 나는 예전에 학교 도서관에 주문해 놓은 책을 순서대로 읽어나가고 있다. 책을 주문한 기준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판 순서에 따라 마음에 드는 책을 인터넷 상에서 설명만 읽고 주문했다. 목록은 전적으로 sfreaders.org에 올라온 신간 정보를 활용했다. 그래서인지 어째서인지 갈수록 이상한 책만 걸리는 것 같다. 아마도 주문할 당시에는 [선집]에 대한 기묘할 정도의 선호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번에도 역시 선집이다. 그것도 주로 20세기 초에 활동한 독일과 오스트리아 작가들의 선집. (오스트리아의 공용어는 독일어다. 문어文語도 상당히 유사하다고 한다. 카프카는 독일어로 글을 썼다.)

 

 부제가 [9살부터 99살까지, 동심에 바치는 책]이고, 책 날개에서도 동화 운운하길래 혹시 [메르헨]을 모아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선집의 원제를 보니 [Im Garten der Phantasie] - 환상의 정원 정도 되는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김재혁씨가 이미 [Im Garten der Phantasie]을 원 텍스트로 삼아서 94년 첵 세상에서 [환상의 정원]이란 선집을 이미 출간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96년에 표지와 수록 순서를 바꿔 [시인]이란 선집으로 재출간되었다. [시인]과 [얌전한 레슬러]의 작품 목록을 비교해보면 약간 차이가 남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 겹치지만 [시인]에만 있거나 [얌전한 레슬러]에만 있는 작품들이 있다. 즉, 김재혁씨는 완역을 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출판사를 바꿔서 같은 책을 원 텍스트로 삼아서 번역했고 이번에는 수록 작품만 살짝 바꿨다.

 

 이것이 바로 생계형 번역일까? 이미 저작권이 소멸된 작가들의 작품이긴 하지만, 선집의 편집이나 기획에는 저작권이 없는 것일까. 과연 이렇게 여러번 번역 출간하면서 독일에 있는 출판사와 계약은 했을까. 여러가지 궁금증이 들지만 풀 길은 없다. 왠지 정진영씨가 책세상에서 번역하면서 자신이 작품을 고른 이유를 알 것 같다. 정진영씨는 성실한 사람이다. (김재혁씨가 불성실한 사람이란 뜻이 아니다.)

 

 생계형이든, [메르헨]으로 분류되는 작품이든 어떻든 간에, 이 책은 환상적인 엽/단편을 모아놓은, 저작권이 소멸된 작가들의 작품들을 모아놓은 흔한 선집 중 하나다. 사실 [메르헨]은 우리말로는 대개 동화로 번역되긴 하지만, [노발리스]나 [E.T.A. 호프만] 같은 독일의 낭만주의 전통 위에서 생각해야지, 단순히 어린이들을 위한 이야기로만 생각하면 곤란하다. ([노벨레]라는 형식이 있어서 여러 작가의 작품은 이것에 속하는 듯한데, [노벨레]가 정확히 뭔지 모르겠다.)

 

 책을 팔기 위해 출판사가 내세운 캐치 프레이즈는 [동화]이지만, 이 선집에는 동화가 없다. 카프카의 [법 앞에서]를 읽고 동화의 노곤한 낙관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카프카는 악몽을 부르는 작가다. 나는 그가 현대에 태어났다면 분명히 나이트 메어의 7번째 속편을 제작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선집에 수록된 작품들의 스토리만 보면 70%는 동화라고 억지로 주장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노발리스의 [푸른 꽃]을 대놓고 패러디하는 토마스 테오도르 하이네의 [파란 꽃]을 읽다 보면 악의가 느껴진다. 어린애들에게 이 책을 읽게 하지 마라.

 

 주의. 엄금.

 

 테오도르 슈토름의 [장미정원과 힌첼마이어]는 또 어떤가. 한 명의 사내가 소박한 즐거움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상을 추종한 나머지 파멸하는 이야기다. 이것은 꿈을 먹고 자라나는 어린이에게나 인생의 종막을 기다리는 늙은이에게나 이롭지 않다. 마리 폰 에브너-에센바흐의 [젊은 왕]은 권력의 정점에 선 자가 파멸하는 이야기다. 잔인하고 냉혹하게. 현실만큼 악독한 간수도 없다.

 

 작가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어째서 이렇게 암울한 작품들만 모이게 된 건지 금세 알 수 있다. 작가들의 프로필을 살펴 보면 맨 노동 운동을 한 사람이거나 독재에 항거하거나, 정치적으로 극단적인 인물들이다. 게오르그 뷔히너는 반정부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적이 있다. 발터 벤야민은 좌파 아웃사이더라고 자처한 인물이다. 에트빈 회른레는 노동자 운동의 경향을 문학에 반영했단다. 헤르미니아 추어 뮐렌의 프로필에는 무려 "노동자들의 연대 의식"이란 문구가 들어가 있다.

 

 다닐 하름스의 [집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나 예브게니 자마찐의 [우리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환상이란 체제에 저항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환상은 꿈 속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을 기술한다. 꿈에서는 무슨 일을 해도 용서가 된다. 환상은 광기를 용서한다. 무마한다.

 

 독일이 19세기부터 끊임없이 민족주의와 전체주의적인 성향을 키워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히틀러를 탄생시킨 토양은 단순히 우연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얌전한 레슬러]의 작가들은 미쳐가는 프로이센을 보면서 창작을 해야 했다. 독일에서 메르헨 전통이 융성한 것은 그만큼 그들의 삶이 끝없는 전쟁과 살육으로 점철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이건 역사에 대해 무지한 내가 그냥 멋대로 상상해본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환상 문학이란 결코 달콤한 상상이 아니다. 환상은 언제나 정치적이며 잔혹한 살해 욕구를 감추고 있다. 히틀러가 화가 지망생이었고 베스트 셀러 작가였으며, 그가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를 좋아했다는 것을 기억하자. 독재자의 시대는 위대한 작가를 만든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용을 죽인 사나이]에서 드래곤 슬레이어는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돌아오지 않는다. 마치 서부 영화 [셰인]의 알랏 란드가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소년에게 등을 보이는 것처럼. 그는 석양을 향해 천천히 말을 몰아간다. 피로 물든 손으로 고삐를 잡고 지친 머리를 가누지 못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용을 죽였기 때문이다.

 

 시대가 그들을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이 시대를 바라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이미 용은 죽었고 셰인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이런 세상에서 [얌전한 레슬러]를 읽는 것은 묘한 낯설음을 느끼게 한다. [얌전한 레슬러]의 낯설음은 우리 모두가 일상에서 경험하지만 애써 잊으려 하는 것이다. 그들의 삶과 글이 동일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삶과 이상이 결코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그저 잠시 머물렀다가 또 다시 다른 세계로 다른 지면으로 걸어간다.

 

 셰인 컴 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