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애나 개벌든의 [아웃랜더]라고 하면 마이너한 취향을 가진 독자들에게도 상당히 낯선 이름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 원서 독해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면 예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제 레이더 안에서는 상당히 낯선 작가와 작품으로 분류됩니다. 최근에, 그러니까 제대하고 나서, 군대 가기 전에 학교 도서관을 통해 주문했던 책을 차례로 빌려보고 있습니다. 대부분 [sfreaders] 라는 위키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책들이지요. 그 중 하나가 아웃랜더인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냥 우연히 얻어걸린 책입니다.
전체 분량이 번역서 기준으로 약 1000쪽을 넘어서는 대작입니다. 2차 대전 직후 간호사가 1700년대의 스코틀랜드로 시간 여행을 해서 벌어지는 이야기 치고는 상당히 길죠. 코니 윌리스의 [개는 말할 것도 없고]나 [둠즈데이북], 어슐러 르 귄의 [어스시 연작]을 읽어본 독자라면 아줌마 수다의 공포를 알 겁니다. 어찌나 수다가 긴지 100쪽이 다 되어서야 타입 슬립을 할 정도입니다. 기존의 한국 차원이동물에 익숙한 독자라면 정말 내던지고 싶을 겁니다. 분량이 이렇게 길어지게 된 것에는 아줌마 작가 특유의 수다도 있지만, 아웃랜더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성묘사 때문이기도 합니다.
시간 여행물이란 게 사실 별로 특출날 게 없습니다. 주인공이 시간 여행을 한다. 모험을 수행한다. 돌아온다. 이 세가지 명제에서 벗어나기가 힘들기 때문이죠. 아웃랜더는 이런 시간 여행물의 명제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주인공은 살아나기 위해 노력하다가, 너무 노력한 나머지 본래의 시대로 돌아가기를 거부합니다. 이미 사랑하는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하의 탱탱한 영주와 결혼하고 사랑 놀음을 벌입니다. 한 200쪽쯤. 이걸 횟수로 따진다면, 아이고 참 힘도 좋으시네요들.
아웃랜더는 시간 여행물이라기 보다는 소프트 포르노에 가깝습니다. 제가 이런 성인 여성 혹은 고연령 청소년을 위한 로맨스물에 무지하기 때문에 약간 오버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동성애와 SM, 소아 성애까지 아우르는 아웃랜더의 폭넓은 성묘사를 생각해보면 제 판정을 변경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군요. 아웃랜더는 [야동]의 세례를 받은 세대의 관점으로 보아도 충분히 야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아웃랜더가 여성의 시점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주로 여성의 쾌락을 중점으로 묘사를 펼쳐나간다는 것입니다.
뭐 그렇다고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우는 건 아니고요. 단지 여성 또한 남성과 여성의 성관계를 다룬 성인물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지요. 한국 인터넷의 젊은층에서는 야오이와 백합물이 유행하면서 마치 여자가 즐길 수 있는 성인물은 게이물, 레즈비언물 같은 비정상적인 성관계에 한정된다는 뉘앙스를 풍기지요. 하지만 일명 [노멀 취향]은 간과될 뿐이지 아예 부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여자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여성에게 남성과 여성의 성관계를 다루는 성인물이 인기가 없는 이유는 그 향유층이 창작단계에서 남성만으로 한정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성의 성적 판타지는 여성에게 거부감을 줄 수밖에 없죠. 마치 야오이를 접한 남성이 느끼는 거부감처럼 말입니다. (여담이지만 저는 아직도 야오이는 손도 대지 못하겠더군요.)
아웃랜더의 시대적 배경은 18세기 스코틀랜드이기 때문에 남성은 마초의 전형으로 그려집니다. 폭력적이고 여자를 제어하는 권리를 사회적으로 부여받았다고 생각하고 온갖 편견에 사로잡혀 있죠. 여기에 1940년대를 사는 주인공이 투입됩니다. 주인공은 여성이 권리를 얻기 시작하는 시대에 태어난 세대입니다. 2차대전을 겪으면서 여성도 남성만큼 일을 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뛰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여성 스스로 자각하게 되었죠. 남성이 전쟁에 끌려가면서 생긴 공백을 여성이 채웠던 것이죠. 게다가 이 주인공은 간호사라는 전문직종이기 때문에 남자와 같이 전쟁을 수행한 정말 [드센] 여자입니다.
그녀는 이미 결혼을 했기 때문에 성경험도 있으며 나이도 20대 후반이기에 성에 무지하고 나이도 어린 파트너 [제이미]는 주도권을 빼앗깁니다. 예. 제이미는 안타깝게도 성교육을 목장에서 받아서 인간이 얼굴을 보며 성행위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네요. 주인공이 제이미를 너그럽게 받아들여주고 참아 주었기에 제이미는 비로소 성에 눈을 뜨게 됩니다. 옙. 제이미는 혼전 순결을 지킨 체리 보이였답니다. 이렇게 시작부터 여성을 주도적 위치에 놓은 아웃랜더는 여성의 쾌락을 무시하거나 과장하거나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관점을 다루는 일은 사실 남자가 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느껴지기까지 하죠. 왜냐하면 남자 입장에서는 과연 여성의 쾌락이 어떤 방식으로 발생하는지에 대해서 대부분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일천한 지식으로 훑어보자면 충분한 전희와 사전에 합의된 충만한 감정의 교류,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 존중하는 최소한의 동의가 여성에게는 중요하다고 묘사되고 있습니다.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해보자면, 제이미는 주인공의 부주의로 일행이 위험에 처하게 되자 주인공을 구타합니다. 이건 당시 18세기 스코틀랜드 사회 통념상으로는 당연한 것이죠. 그러나 제이미는 이 [정당한 응징] 이후에 주인공과 동침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적절하지 않다]라고 애매모호하게 제이미의 입을 통해서 말해집니다. 물론 주인공은 그건 부부 사이에 벌어지는 [강간]이다, 네가 강간을 하지 않을 최소한의 지각은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직설적으로 말하죠. 이 에피소드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야만적인 남성임에도 제이미가 주인공의 남편으로 간택된 이유는 제이미가 배려와 존중이란 단어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남성을 위한 성인물에서 여성에게 억압적인 상황은 당연한 것으로, 심지어는 권장할만한 것으로 그려지곤 합니다. 바로 이 지점이 여성과 남성이 가지는 성적 판타지의 균열점입니다. 남성에겐 정상적인 성관계로 여겨지는 것이 여성에겐 강간일 수 있는 것이죠. 부부간에 강간이 성립하는 것도 이런 의식 차이 때문입니다. 여성에게 남성의 성적 판타지란 범죄물의 단초로밖에 인식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수많은 성인물이 강제 키스라거나 겁탈에 가까운 성묘사를 남발하죠. 이건 성인물만이 아니라 일반 드라마나 소설에서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여성이 먼저 덤벼들기도 하지만 남성이 먼저냐 여성이 먼저냐하는 것은 중요치 않습니다. 중요한 건 둘이 사전에 충분히 합의를 했느냐, 둘이 동등한 입장이냐, 둘의 감정이 적절한 수준으로 일치했느냐이죠. 이런 것 없이 벌어지는 성묘사는 남성이 먼저 하든 여성이 먼저 하든 상관없이 동일하게 폭력으로 간주됩니다.
김기덕 감독의 작품이 가장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죠. 그의 작품에선 언제나 남성이 여성에게 물어보지 않거든요. [나쁜 남자]에서는 아예 남자가 말을 하지도 않죠. 물론 김기덕 감독의 작품에 나오는 남자의 태도는 인간의 소통 문제를 은유하는 면도 있죠. 안타깝게도 예로 들어지는 것이 언제나 남성의 관점만이라서 오해를 사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오해인지 아닌지는 의견이 분분하겠습니다만. 어쨌든 이 글은 김기덕 감독을 품평하자는 것은 아니고. 여성 작가의 눈이 아니라면 성묘사는 폭력과 구분되지 않을 때도 있다는 것이죠. 아웃랜더에서 등장인물들은 수없이 강간의 위협에 노출됩니다. 주인공만이 아니라 제이미도 남색이나 소아 성애로부터 자유롭지 않죠. 결국에 고약한 녀석에게 걸려 당하기까지 합니다. 남성도 강간당할 수 있다. 예. 어떻게 보면 아웃랜더는 심오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바로 문학의 좋은 점이지요. 겉으로는 소프트 포르노이지만 속으로는 여성주의 문학. 어느 것을 취할지는 독자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만.
아웃랜더는 여성의 입장에서 성관계를 바라봅니다. 과연 이 소설에서 여성들이 정말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 원천이 여성의 입장에서 바라본 성관계인가하는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말했듯이 전 여자가 아니라서요. 하지만 이색적인 건 사실입니다. 기존의 성인물과는 큰 차이가 있어요. 성관계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순정만화하고도 좀 다르고요. 시간 여행물을 예상하고 읽는 다면 크게 실망할지도 모릅니다. 그 부분은 그냥 설정이에요. 어떻게 여자가 침대에서 주도권을 잡고 마침내는 일상 생활에서까지 남자를 말그대로 죽이고 살리는지를 그린 게 아웃랜더입니다. 이건 작가의 개인적인 판타지일까요 아니면 여성 보편적일까요. 개인적으로는 제이미가 주인공 때문에 너무 고생을 하고 주인공에게 잡혀 살기 때문에 안타깝더군요. 물론 제이미는 키 큰 거인에다 금발에 가까운 붉은 머리이면서 라틴어와 이탈리아어, 프랑스어에 능통하고 고전에 익숙하며 칼솜씨도 뛰어나고 알짜배기 영지까지 가지고 있는 미남이지만 말입니다. 영리하고 배려심 넘치며 공정하며 열정적이고 과감한데다 용감하고 너그럽기까지 합니다. 예. 먼치킨 맞습니다. 맞고요. 이런 남자를 손아귀에 쥐고 흔들고 게다가 외조도 만만치 않은 주인공도 먼치킨 맞습니다. 맞고요.
사실 다이애나 개벌든은 2류에 불과합니다. 코니 윌리스 정도는 되어야 1류라고 할 수 있죠. 어슐러 르 귄이요? 아 그 할머니는 초일류죠. 아웃랜더는 어디까지나 시간여행물을 빙자한 소프트 포르노입니다. 여기에서 여성을 주체로 두는 노멀 취향의 성인물을 찾아도 좋고, 그냥 이색적인 포르노를 찾아도 좋겠지요.
어느쪽이든 한 번 탐색해볼만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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