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책을 읽다 보면 숨겨진 보물을 발견할 때가 있다. 기분 좋은 일이지만, 안타까운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숨겨진 보물이 황금이라면 돈으로 바꿔서 부귀 영화를 누릴 수 있지만, 그것이 책이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책은 만인이 읽어서 인류의 의식 성장에 기여할 때만이 보물로서 가치가 있다. 책에 관해서라면 '숨겨진 보물'이란 말은 아무 의미도 없다. 읽지 않는 책은, 읽히지 않는 책은 책이 아니다. 책은 누군가에게 읽히기 위해서 존재한다.
로버트 오브라이언의 [니임의 비밀]은 그러한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표지부터가 상당히 마음에 안 들게 나왔다. 이 책은 '뉴베리상' 수상작이다. 동화라는 얘기다. 뉴베리 상은 동화 분야에서 꽤 권위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책을 많이 읽어본 사람이라면 한 번은 들어봤을 만한 상이다. 그런데 동화에 이런 표지를 넣었다니, 선뜻 이해하기가 힘든 일이다. 게다가 제목이 [니임의 비밀]이다. 어허. 이럴 수가. 어린애들이 이런 제목에 끌릴 리가 있겠는가. 원제는 Mrs. Frisby And The Rats of Nnimh로 '프리스비 부인과 니임의 쥐들'이다. 차라리 원제를 그대로 번역하는 것이 나을 뻔했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라면 이 글이 동화 같지 않은 모습으로 책을 낸 출판사를 비난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그것도 내가 하고자 하는 말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 얘기만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출판사가 마케팅 포인트를 잘못 잡았다는 것이지, 동화스러운 제목과 표지를 뽑아내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이 책은 동화 같지만 동화가 아니다. 훌륭한 SF다. 출판사가 제목과 표지를 진지하게 뽑은 것은 실수만은 아니다. (그러나 완벽한 선택도 아니었다. 게다가 저 표지는 sf에 어울리는, 책의 내용을 설명하는 표지도 아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의인화 된 쥐가 등장한다. 그녀의 이름은 프리스비 부인. 몸이 아픈 아들 쥐를 걱정하는 그녀는 걱정이 많다. 이제 날이 풀리면 농부가 밭을 갈게 될 텐데, 그러면 밭에서 겨울을 지낸 프리스비 부인 가족은 개울가로 이사를 가야 한다. 하지만 그녀의 아들은 몸이 아파서 움직이지를 못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에 빠진 프리스비 부인은 여차저차해서 시궁쥐들을 찾아가게 된다. 시궁쥐들의 비밀 거처는 놀랍게도 전기가 들어오고, 상하수도가 완비된 곳이었는데...
알겠는가. 처음 시작은 분명히 의인화된 동물을 등장시켜서 우화를 펼치는 동물 판타지 동화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갑자기 인간 만큼 똑똑하며, 나름대로 문명을 이룬 쥐가 등장한다. 찍찍거리는 쥐 말이다. 소설은 100페이지까지는 판타지 동화였다가, 그 후로는 마치 다니엘 키스의 [앨저넌에게 꽃을]을 연상시키는, 지능의 급속 진화를 다루는 SF로 변모한다. [앨저넌에게 꽃을]은 지능을 증진하는 약물 실험을 통해서 천재가 되는 지적 장애인을 다룬 소설이다. '앨저넌'이란 주인공 찰리와 함께 실험을 받은 쥐의 이름이다. 그런데 [니임의 비밀]에서는 이 쥐가 바로 주인공이다. 쥐들은 '니임'이란 연구소에서 연구 대상으로서 약물을 투여받는다. (혹시 로버트 오브라이언의 일종의 오마쥬를 시도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출판 시기를 봐도 [니임의 비밀]이 훨씬 나중이다.)
처음 동화 부분은 아기자기하고 귀엽게 쓰여져 있다. 적당한 긴장감과 궁금증을 유발한다. 그러나 성인 독자가 읽기에는 너무 정적이다. 그에 반해 sf 부분은 궁금증이 해소되는 부분이기도 하고, 앞 부분에서는 예상하기 힘든 부분이라서, 그 자체로 반전 역할을 한다. 보통 소설에서 반전은 사건 설명에 국한되지만, [니임의 비밀]에서는 서술 방식과 분위기의 전환, 소설의 나머지 분량 전체가 반전이 된다. 매우 놀라운 서술 전략이다. 그러나 sf 부분은 어린 독자가 읽기에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약물로 지능이 높아진다는 아이디어는 sf에서 수없이 다루어졌던 소재가 아닌가. 일본 만화에서도 이미 70년대부터 갖고 놀았던 아이디어다. 게다가 이 아이디어는 과학 기술로 인해 인간의 존재 근거가 변화한다는 함의를 담고 있기에 sf에 매우 적절하다. [니임의 비밀]은 기존 sf 소설들에 대한 경배이며 패러디이다. 로버트 오브라이언은 쥐의 모습을 빌려서 '인간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기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쥐가 더이상 쥐가 아니게 될 때, 그 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은 인간이 과학 기술로 인해 인간이 아니게 되었을 때(사이보그?), 그의 정체를 무엇으로 규정해야 하는가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알라딘 리뷰를 훑어보면 (http://blog.aladdin.co.kr/714960143/1524433) 초등학생 고학년이면 [니임의 비밀]의 내용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심도 깊은 의미까지 건져 낼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물론 책을 읽는 방법이나 이해하는 방식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니임의 비밀]이 가진 진정한 측면을 눈치채지 못하고, 일종의 거세된 독서를 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동화라면 초등학생도 얕은 의미만이 아니라 깊은 의미까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니임의 비밀]에 담긴 은유는 sf에 익숙한 독자, sf의 법칙에 능한 독자가 아니라면 즐기기 어렵다. 잡아낼 수는 있다. 하지만 즐기기까지 하는 건 어렵다. 이건 작가가 준비한 숨은 그림 찾기이다. 무척 단순한 형태이긴 하지만.
이 소설을 독자들이 발굴해내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더스트 재킷을 수놓고 있는 저 엉터리 표지 때문이다. 보기에 나쁜 떡은 맛도 없게 느껴진다. 두 번째 이유는 이 책의 초반이 동화풍이기 때문이다. 동화만 보면 경기하는 사람이라면, 초반이 완벽하게 동화라서, 뒤에서 나올 이야기를 전혀 예상할 수가 없어서, 독서를 접게 될 수도 있다. 갑자기 sf로 전환되는 재미도 있지만, 아예 sf인지 뭔지 알지 못해서 읽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동화의 벽을 뛰어넘지 못한다면 sf의 달콤한 열매도 없다. 이것이 내가 이 글을 굳이 리뷰까지 쓰면서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이유이다.
좀 더 많은 독자들이 [니임의 비밀]의 달콤함을 맛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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