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재미있는 선집은 아니다.
나는 '행복한 책읽기'라는 출판사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사장인 임형욱씨는 sf팬으로 sf 출판에 대해서 열의를 가지고 있다. 영세한 출판사인 '행복한 책읽기'는 거대 출판사인 '황금가지'나 '오멜라스'보다 친근하고 보다 소비자 지향적이다. '행복한 책읽기'의 출판사 사이트인 happysf.net 은 마치 sf 동호회 게시판처럼 이용되기도 할 정도다. 이 어려운 출판 시장에서 sf를 출판한다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또한 한국에 출판된 최초의 하드sf 선집이기에, 이 책에 대해서는 좋은 얘기를 쓰고 싶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 솔직한 독후감은 '재미없다'이다. 아 이런 얘기를 왜 써놓은 거야 빌어먹을.
맨 처음에 소개된 엽편 '리얼리티 체크'부터 문제가 심각했다. 도무지 뭔소린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번역자인 홍인수씨는 역자 후기에서 이 작품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데이비드 브린의 [리얼리티 체크]는 과학자들을 위한 우화입니다. 과학적인 아이디어가 아닌 과학적 탐구 과정 자체를 소재로 삼고 있는 작품입니다. '세상 천지에 새로운 것은 없다', 혹은 '내가 생각한 것은 남들도 다 생각해 보았다.'라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새로움이 없는 학문에 대한 묘사를 작품화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리얼리티 체크'를 읽어본 독자라면, 도대체 어떻게 이런 해석이 나올 수 있는지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뭐야 그런 얘기였어?"라는 반응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차원을 넘어서 해석으로 창작을 뛰어넘는 그야말로 포스트 모던한 후기다. 뭐 엽편은 그렇다 치고.
두번째 작품인 '올림포스산'은 과학적으로 엄밀한 화성 모험담을 그려내고 있다. 지금까지 sf에서 반복된 문어발 외계인 이미지의 대항으로 쓰여진 작품이다. 박테리아를 발견하고 "생명체를 발견했어!"라고 떠드는 모습에서는 감동보다는 실소가 먼져 터져나온다. 이래서야 하드 sf가 장난감에 미친 기술중독자들의 소설이라고 모함을 해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을 것이다. 스토리보다는 화성 탐사의 실제를 묘사하는 일에 더욱 열중한 소설로, 과학적으로는 엄밀할지는 모르지만, 소설로만 봐서는 완전히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위험을 감수하고 과학의 발전을 위해 연구에 종사할 것을 다짐하는 결말을 보고, 이러한 계몽적인 외침 앞에서 진지함을 유지할 수 있는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이런 결말이 의도된 것이라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세번째 작품인 '어느 성화학자의 생애'에 와서야 비로소 재미있게 읽을 만하다. 생명공학을 통해 성적 능력을 향상하다는 아이디어부터 흥미롭다. 게다가 sf 특유의 점층적이고 세계 자체를 뒤집어 버리는 결말에서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이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소설답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피터 와츠의 '틈새'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들먹이는 해설이 붙기는 하지만, 출판사에서 왜 여러번 거절을 당했는지, 아직도 미국에서 출판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지루하고 어수선하다. 스티븐 백스터의 '기러기 여름'은 제목부터가 영어식 말장난 같은 것이서 이해가 안될뿐 아니라 전체적인 내용도 별 게 없다. 외계 생명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인간의 생명을 경시한다는 기반 설정이 모순적이고, 위기를 해결하는 방법도 과학적으로 엄밀할지는 모르지만 심심하다. 칼 슈뢰더의 '헤일로'는 어중간한 작품이다. 항성간 우주선이 우주 식민지를 파괴하다는 기본 아이디어에 사랑이나 가족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 같은데 그리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좀 더 예민하고 세밀한 상황 설정과 묘사가 필요했다.
앨런 스틸의 '착한 쥐', 마이클 플린의 '시간의 모래성'는 충분히 감동적이고 심지어는 유머감각까지 들어있다. 상대적으로 하드 sf다운 맛은 덜해서, 이러한 선집에 굳이 들어가야 할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다. 그러나 작품 자체는 아주 좋다. 프레데릭 폴의 '불사조 품기'는 그냥 보통 sf인데다 딱히 재미있지도 그렇다고 재미없지도 않다. 가독성이 좋다는 것 말고는, 시간 때우기에 적절하다는 장점밖에 없다. 로버트 리드의 '매로우'는 가장 거대하고 서사가 탄탄한 작품이다. 작품 중에서 소설로서의 완성도가 가장 높다. 나름대로 반전도 있고 독자들에게 흥미를 주려는 노력도 많이 한 작품이다.
작품집의 전체적인 경향은 '늙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최신의 경향일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작가들이 대부분 1950년대 이전 출생이고, 개중에는 1세대(1919년생)에 속하는 사람까지 있다. 과학적 엄밀성에 치중하다가 소설적 재미를 잃어버린 단편과 소설적 재미는 있지만 어째서 하드한지는 알 수 없는 단편이 적절이 섞여 있는 이 선집은 실패작처럼 보인다. 하드 sf 르네상스 2에서는 좀 더 나아질지도 모르니, 일단 결정적인 판단은 유보해야겠다.
그다지 일독을 권하고 싶은 선집은 아니다. 하드 sf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독자들에게 이 선집은 매우 불친절하다. 작가 소개 중 하드 sf를 낙관적인 문학이니 뭐니 하면서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그건 작가 개인의 문예론적인 관점에서는 타당할지 모르나, 범주론적인 측면에서는 개소리다. '낙관적인'이라는 관점의 문제가 문학을 재단할 수 있다고? 대체 어떤 새끼가 그래? 한국 독자들은 하드 sf라고 하면 대개 아서 클라크를 떠올리기 마련인데, 아서 클라크식의 거시적인 작품보다는 캐릭터에 집중하는 미시적인 작품이 많은 편이다. 과학적 지식이라는 것도 행성 지형에 관한 것, 물리학, 스타워즈식 워프 이론 같은 구식의 이론들이 대부분이며, 그것들은 그저 제시될 뿐 소설 내부로 녹아들지 않는다. 정말로 머리 아픈 하드 sf를 읽고 싶은 사람에게도, 우주의 운명을 농락하는 과학적 법칙의 향연을 보고 싶은 사람에게도 이 선집은 실망스러울 것이다.
옆에 있는 오크년들이 일은 안하고 맨날 시끄럽게 떠들어서 글이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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