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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책/오늘 읽은 sf

플레바스를 생각하라, 이언 M. 뱅크스

 

 침묵. 끝없는 침묵이 있었다. 태초에 침묵이 있었다. 떨림. 진동. 허공의 공허한 매질이 무위의 운동을 시작한다. 무엇을 위해. 단지 플레바스를 상기하기 위해.

 

 이언 뱅크스는 김상훈씨의 번역으로 출간된 [말벌공장]으로 국내에 처음 소개된 작가다. 그는 약간 늦은 나이 - 30대에야 첫 소설을 펴냈는데 그의 데뷔작 [말벌공장]을 출간하자마자 엄청난 센세이션이 영국 내에서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솔직히 지금 관점으로 보면 [말벌공장]이 무에 그리 대단한지 잘 모르겠다. 이언 뱅크스는 잔인하고 끔찍한 묘사를 천연덕스럽게 해내는 기묘한 재능을 지닌 건 분명하다. 그러한 재능이 80년대 보수적인 영국 사회에 파장을 일으켰을 거라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파장이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기에 구체적 맥락을 감안하지 않고서는 어떤 판단도 내릴 수 없다.

 

 필자가 읽어본 바로는 [말벌공장]이 그리 대단한 작품은 아니었다. 약간 충격적인 부분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말벌 공장]을 출간 한지 3년 후에 낸 스페이스 오페라 [플레바스를 생각하라]는 정말이지 엄청난 충격을 내게 주었다. 나도 이제 독서 경험이 10년을 훌쩍 넘어가고 그 중에서 SF를 읽어온 기간도 5,6년은 된다. 잔인하고 끔찍한 묘사, 광대하고 무자비할 정도로 거대한 세계를 그린 소설도 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아서 클라크의 시대와 세계를 아우르는 관점을 읽었고 오츠 이치의 손발이 오그라드는 묘사도 읽었다.

 

 하지만 이토록 독자를 철저하게 배신하고 또한 매료시키는 작품은 한번도 읽어보지 못한 것 같다. 테드 창의 단편집을 읽어내릴 때의 전율과는 또 다른 떨림이 읽는 내내 손가락을 통해 전해졌다. 차마 다음 문장을 읽어낼 수가 없어서 고개를 들고 천장을 바라본 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다 읽고 나서는 책을 던지고 싶었고, 그러고 싶었음에도 차마 던지진 못했다.

 


 이번에 [플레바스를 생각하라]를 번역한 김민혜씨는 (프로필 상으로는) 두 번째로 책을 번역하는 초보 번역가다. 그래서인지 김상훈씨가 번역한 [말벌공장]과는 달리 문장이 전혀 매끄럽지가 못했다. 물론 [플레바스를 생각하라]는 기술적인 용어가 수없이 쏟아지고 문장 구조도 상당한 만연체에 혼란스러운 묘사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누가 번역하더라도 [플레바스를 생각하라]가 번역하기에 쉬운 작품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김상훈씨는 지금까지 번역한 책만 해도 최소한 20권이 넘는 베테랑이다. 그런 사람의 번역과 비교하는 것은 김민혜씨에게 너무나 부당한 처사이리라.

 

 그러나 [플레바스]의 번역이 똑바로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영어에 문외한인 사람의 눈으로 봐도 확실하다. 아무래도 [플레바스]의 교열을 본 사람이나 김민혜씨나 한국어에 대해서는 젬병이었던 것 같다. 곳곳에서 [이]와 [의], [에]를 혼동하는가 하면, 분명히 한국어 어법에 크게 어긋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읽어내려 갈 수가 없는 문장이 허다했다. 이것은 번역자 스스로 자신이 번역하고 있는 문장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번역했다는 뜻이다. 특히 문장 구조를 그대로 살리려고 만연체를 끊지 않고 놔두었는데 그 정도가 너무 심해서 호흡이 길어지는 바람에 문장의 의미가 매우 모호해지고 가독성도 떨어졌다. [플레바스]의 문장이 원래부터 난잡했는지 아니면 번역 과정에서 이토록 읽기 힘들 정도로 난잡해진 건지, 난잡해진 거라면 얼마나 난잡해진 건지는 알 수 없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이다.
 
 "공기와 구름이 빚어내는 거대하고 갑작스런 소용돌이의 가운데에서, 그리고 우주선이 만들어 낸 조그만 회오리바람 속에서, 청천난류는 한 압력 레벨의 바닥에 깔려 있던 두꺼운 공기를 뚫고 다음 압력 레벨 맨 위의 희박한 대기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위는 마지막 식사를 절대로 다 소화하지 못할 것이고, 마지막 남은 힘까지 짜내야 할 때를 대비해 평소에 산소 포화도가 특별히 높은 피를 비축해 두는 전방 폐낭도 비어 가고 있었다."

 

 차근차근 읽어나가면 의미를 알 수는 있다. 하지만 [플레바스]처럼 속도감 있는 소설에서 이런 종류의 문장이 거듭된다는 것은 큰 문제다. 읽다 보면 머리가 다 아프다. 정말 이런 식으로 번역할 수밖에 없었는지 아니면 번역가의 실력 부족 탓인지 솔직히 나는 확신을 할 수가 없다. 이런 문장으로 가득한 600페이지에 달하는 우주 활극을 읽다 보면, 잔인한 묘사와 급격한 전개, 광대한 설정, 갑작스럽게 돌출하는 심오한 물음에 넋이 빠지기 일쑤다. [플레바스]의 번역자는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서평에서나 어울릴 문장을 대중 소설에서 구사하고 있다. 문장은 짧을수록 이해하기 쉽다. 긴 문장은 왠만한 실력이 아니고서는 제대로 구사하기 어렵다. 소설에서는 더욱 그렇다.
 

 

 [플레바스]는 잔인한 묘사가 주를 이룬다. 보기만 해도 욕지기가 치밀어오르는 단어와 상황이 연속된다. 주인공은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기로에 처한다. 원래 주인공을 고생시키는 건 상업 소설의 숙명이다. 주인공이 맞고 다치고 찢어지고 피를 흘릴 때마다 독자들은 쾌감을 느낀다. 독자들은 주인공이 죽기 직전까지 몰려 마침내 희망을 모두 잃어버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 주인공은 끝까지 독자들의 기대를 배신한다. 결말에 가서야 주인공은 선택의 기로에 처한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선택. 끝이 정해져 있는 선택이다.

 

 문제는 이언 M. 뱅크스가 이런 선택을 주인공에게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주인공도 죽고 조연도 죽고 조연 옆에 있던 엑스트라도 죽는다. 악당도 죽고 악당 친구도 죽고 우리 편도 나쁜 편도 아닌 녀석도 죽는다. 말 그대로 다 죽는다. 작가는 단지 생명의 소멸만을 그리지 않는다. 수천 킬로미터의 크기를 가진 거대 우주 식민지도 파괴한다. 장엄한 파괴의 순간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리고 말한다.

 

 이봐 그렇게 발버둥친다고 해서 뭐 별 거 있을 것 같아?

 

 별 거 없다. 정말로. 남는 건 깊은 절망과 소소한 지루함 뿐이다.

 

 우리는 소설을 왜 읽을까. 그건 주인공의 활약을 보기 위해서다. 주인공은 강할 수도 있고 약할 수도 있다. 그건 부차적인 문제다. 그러나 주인공은 언제나 무언가를 행한다. 설령 그것이 무위無爲일지라도! 주인공이 무언가를 얻고 버리고 깨닫고 잊는 사이에, 그가 손에 쥔 것이 변질되고 창조되고 소실되는 가운데, 독자는 쾌감을 얻는다. 이건 어쩌면 대중 소설의 가장 우선적인 책무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플레바스]는 이것을 헌신짝처럼 내버린다. 단지 사람이 죽어나갔기 때문에 잔인한 것이 아니다.

 

 작가는 그들의 죽음이 아무런 보답도 얻지 못할 거라고 말한다. 이 냉철한 진실을 눈 앞에 들이밀기 때문에 잔인한 것이다. 그런 종류의 잔인함이란 어떤 약으로도 치료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얻는 고통에는 백약이 무효이기 때문이다. 커트 보네거트가 말했듯이, [설령 웃음이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면 모를까.]

 

 플레바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이 죽음에 대면하는 장면을 이어붙인다. 이건 너무 의도적이라서 지겹기까지 하다. 영웅은 본래 시련을 겪는다. 그의 시련은 성공을 담보로 한다. 사람들이 죽어나간다고? 어차피 녀석들은 영광을 위한 발판이다. 하지만 작가가 담담한 어조로 광년 단위로만 측정이 가능한 세계를 논할 때, 영광도 성공도 없는 마지막에 도달한다면, 독자는 무엇을 가슴에 담고 책을 덮어야 할까. 대체 작가가 그간 신나게 묘사한 [태양 크기의 우주 식민지], [은하계를 아우르는 우주 전쟁], [세계의 멸망을 둘러싼 포커 게임], [산만큼이나 거대한 배]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책을 다 읽은 후에 독자의 가슴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의 가슴에 담긴 공허는 어찌할 것인가.

 

 공허.

 

 가끔 나는 이 녀석을 무척 좋아하게 될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