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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책/오늘 읽은 비소설

판타스틱 08년 8월호

 판타스틱, 많이 컸다.

 

 책을 펴자마자 든 생각이다. 처음 판타스틱을 훑어봤을 때까지는 그랬다. 07년 9월에 판타스틱을 사본 적이 있는데, 그때에 비해 지면 배색, 구성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되어졌기 때문에 감탄사를 뱉어냈다. GQ나 에스콰이어 같은 기성 남성 잡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실제로 꼼꼼히 읽어내려가다 보니, 가독성에 약간 문제가 있었다. 글자 크기가 가끔 너무 작아진다. [장르 소설 7일 야화] - 제 5야와 제7야에서 책을 연달아 소개하는 부분에서 사용한 글자 크기는 주석에나 사용해야 할 정도로 작았다. 게다가 기사 전체적으로 글자 크기가 일관되지 못하고 3가지 크기가 번갈아서 사용된다. [8월 장르 문학 달력]에서는 6이나 7정도 되는 크기였다가 그 뒤에 있는 [트렌드 픽 업]에서는 8정도로 약간 커졌고 이것이 지속되다 [납량 특집]에서 9 정도로 다시 커지고, [장르소설 7일 야화]에서는 다시 [트렌드 픽 업]의 글자 크기로 돌아간다. 정신이 없다. 눈이 글자 크기에 적응될 시간이 부족하다. 어째서 기사 하나를 경계로 본문의 글자 크기가 왔다갔다 하는가. 그리고 왜 이렇게 작은 글자를 설명 위주의 기사에 사용했는가. 가독성이란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내게는 판타스틱의 글자가 너무 작고, 눈을 피로하게 했다.

 

 07년 9월에 판타스틱과 번역 무크지인 [파우스트]를 동시에 산 적이 있다. 당시 판타스틱이 보여준 지면 구성이 한국 잡지의 일반적인 수준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지는 수준이어서, 세련됨에서나 가독성에서나, 크게 실망한 적이 있다. [파우스트]는 밋밋하기는 하지만 문예지 풍의 백색 지면을 보여줘서 가독성이라는 토끼는 잡을 수 있었다. 둘을 비교하는 것은 마치 내 자식을 옆집 자식과 비교하는 기분이 들어 그리 유쾌하지는 않지만, 판타스틱의 비루함은 안타까운 것이어서 굳이 지적한다.

 

 판타스틱은 07년 9월보다 가독성 측면에서는 오히려 후퇴했다. 글자 크기가 왔다 갔다 하는 건 07년에도 마찬가지였으나 흰색 지면을 주로 사용했기 때문에 일정 가독성은 보장되었다. 구성이나 배색이 그리 화려하지 않아서 눈을 방해하는 것도 없었다. 그런데 08년에서는 너무 화려해졌다. 사진 사용이 빈번해졌고 소설 부분에서조차 테두리를 무늬로 꾸미는 등 정신을 분산하는 요소가 많아졌다. 사진이 본문을 침범하거나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는 모습은 멋있기도 하지만, 정신 사납다. 사실 GQ 같은 잡지에서 그렇게 화려한 지면 구성을 하는 이유는 기사 내용이 실제로는 농담 따먹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 심각한 내용도 아니고 자세히 읽어보면 무의미한 수사로만 가득하다. 그런데 판타스틱 같은 경우에는 기사의 대부분이 책 소개인데다가, 책 소개를 하는 방식도 구체적으로 줄거리와 작가 소개를 하는 [정보] 위주다. 도대체 이토록 빡빡하게 작성된 기사를 어떻게 이런 작은 크기의 글씨와 이토록 정신 없는 지면으로 읽어내란 말인가. 가뜩이나 기사가 재미없어 죽겠는데.

 

 기사가 너무 재미 없다. 왜 이렇게 된 걸까. 07년 때는 좀 더 느긋했다. 책 한 권을 소개할 때도 2페이지를 다 사용했다. 그런데 08년에 와서는 1페이지에 책 세 권을 끼워넣으려고 노력한다. 07년 때는 신간 리스트를 제공하고 책 몇 권만 소개하는 식이었는데, 08년에는 어떻게든 더 많은 책과 영화를 소개하고 싶다는 열망이 엿보인다. 그런다고 해서 잡지가 더 알차게 되는 것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인터넷 뒤지면 다 나오는 거 아닌가. 어째서 판타스틱 같은 장르 전문 잡지에서 그렇고 그런 책과 영화의 리뷰까지 봐야 하는가. 영화 리뷰를 보고 싶으면 1000원 짜리 영화 잡지를 보면 된다. 책 리뷰를 보고 싶으면 메타 블로그 사이트를 돌아다니면 된다. 잡지는 신문과 달라서 양이 아니라 질로 승부해야 한다. 그런데 판타스틱의 기사 질은 개인 블로그에 올라오는 평보다도 못하다.

 

 [장르 소설 7일 야화]는 이번 판타스틱의 특집 기사였다. 그런데 겨우 이런 게 특집인가. 기자들이 어떻게 특집을 작성했는지 눈에 보이는 듯하다. 일단 책 목록을 결정한다. 그리고 기자마다 적당히 배분한다. 읽고 쓴다. 간단하고 단순한 과정이다. 어려울 게 없다. 기계적이다. 그런데 아무리 기자가 뛰어나다 해도 1달 만에 5권이 넘는 책을 읽고 기사를 작성할 때 얼마나 심도 있는 기사가 나오겠는가. 기자는 그 기사만 쓰는 것도 아니고, 그 책만 읽어야 하는 것도 아닌데. [제5야 한국 단편선 주목작들] 같은 기사는 마치 보도 자료만 보고 쓴 것 같다. 작가들의 이력을 지겹게 나열하고 작품 특징을 간소하게 소개하고, 다시 다른 단편집 작가들의 이력을 지루하게 반복한다. 선집인 경우에는 작가 수가 많아서 지면 채우기가 더 쉽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뻔한 정보들로만 [때우는] 것은 좀 심하다. 대체 출판사에서 내놓는 보도 자료보다 질이 낮은 기사를 누가 돈 주고 사보겠는가. 

 

 ([아이, 로봇]의 소개글에서는 평자가 스포일러성 발언을 남발하고 있다. 독자들은 주의 바란다. 어차피 다 읽었겠지만. 아시모프는 밋밋하고 재미없는 글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반전이 밝혀지면 읽는 재미가 현저하게 떨어진다. 그럼에도 평자는 작품의 반전을 모조리 밝혀놨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싶어서 생각해봤다. 일단 디자인 면에서는 디자인 팀이 바뀐 것이, 또 그들이 GQ 같은 기성 잡지의 스타일을 그대로 흉내낸 것이 문제인 것 같다. GQ의 지면 구성은 판타스틱과 비슷한 수준이거나 훨씬 정신이 없다. 그런데 GQ의 경우에는 어디까지나 기사 중심이 아니라 화보 중심, 광고 중심이다. 때문에 이렇게 가독성을 약간 무시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독자들은 기사 같은 건 별 관심도 없다. 화보에 나오는 엄청난 가격의 옷이나 구두를 구경하는 것에 더 관심이 많다. 그런데 판타스틱은 소설이 중심이고 기사가 뒷받침해주는 역할이다. 기사는 소설로 가기 위한 호객꾼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 호객꾼이 업소 아가씨보다 더 화려한 옷차림으로 온갖 서비스를 다해주겠다며 덤벼든다면, 그것이 좋은 사람도 있겠지만, 나처럼 부담스러워서 발길을 돌릴 수도 있다. 혹시 디자인에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 본말 전도는 아닌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호객꾼은 그저 재치있는 말솜씨로 흥미만 불러일으키면 된다. 굳이 화장을 짙게 하고 향수를 뿌려서 손님을 홀릴 필요는 없다. 어차피 손님이 원하는 건 업소 아가씨이지 호객꾼이 아니다. 물론 기사를 더 재미있게 읽는 독자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정말 판타스틱 기사는 독자들이 탐독할 만한 수준인가. 내가 보기에는 아니다.

 

 기사는 [재미있어야만] 한다. 요즘 남성 잡지에서 사용하는 문체가 괴상망측하다는 얘기가 많지만, 읽어보면 재밌다. 판타스틱은 재밌게 기사를 쓰려는 노력이 없다. 남성 잡지 기사가 20대가 술 먹고 쓴 것 같다면, 판타스틱 기사는 중고생이 학교 숙제로 쓴 독후감상문 같다. 술 먹고 쓴 글은 나중에 읽어보면 우습기라도 하지, 중고생 숙제는 거들떠보기도 싫다. 기자들이 너무 책만 읽고 글을 쓰려고 한다. 소개 기사가 주를 이루고 분석 기사, 취재 기사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게임 웹진도 판타스틱보다는 취재 기사가 많다. 게임 웹진은 중국에서 게임쇼가 열리면 취재를 간다. 하지만 판타스틱은 중국에서 sf 컨벤션이 열리면 취재를 갈 것인가. 그리고 기사의 수준이 너무 낮다. 기사 내용의 주는 그냥 어떤 책이 이 책과 비슷하고, 이 작가의 전작은 무엇이고 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충분히 써낼 수 있는 것들이다. 사실 내가 쓰면 그것보다는 더 잘 쓰겠다. 즉,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군인들이 많이 보는 [맥심]에도 장르 관련 기사가 가끔 뜬다. 영화 잡지 기자들도 장르 소설을 많이 읽어서 가끔 관련 기사가 실린다. 읽어보면 매우 심도 있고 장르의 본질을 명확하게 꿰뚫고 있다. 그런 애매한 얘기를 차치하고서도 일단 읽는 재미가 있다. 판타스틱은 그들만도 못하다. 그들이 인터뷰할 때 얼마나 정신나간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는지 아는가. 무례할 정도로, 김구라 흉내를 내면서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고, 기사를 작성한다. 천박해 보이지만 읽고 싶어진다. 인터뷰어는 싸구려 개그맨이 되지만 질문의 이면에는 날카로운 검이 숨겨져 있다.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 받으면서도 해야 할 얘기는 다 한다. 나는 솔직히 그들이 스타에게 정말 그렇게 막말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딴지일보]가 그러는 것처럼 나중에 문체를 다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센스가 중요하다.

 

 게다가 판타스틱에는 트렌드를 소개하는 기사가 너무 많다. 앞 부분에 주로 집중되어 있는데, 에어컨 스프레이 출시 소식을 독자들이 정말 원한다고 생각하는가. [저스티스]의 신보가 뒤늦게 발매된 것은 물론 기자 개인으로서는 중요한 사건일 수 있겠으나 그것이 장르 전문 잡지에서 굳이 다룰 이유가 있는 소식인지 의문이다. 그 정도 소식은 인디 음악 전문 필자인 김작가씨의 개인 블로그만 방문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저스티스]와 장르는 어떤 상관관계를 가졌는지 궁금하다. TV쇼 소개나 [핑거톤스] 리뷰도 마찬가지다. 에어컨 스프레이는 그나마 sf적이기라도 하지. 이것은 07년때부터 계속 이어져 내려오는 코너인데 그때에 비해 정제되긴 했으나 여전히 필요성을 알 수가 없다. 이건 기자들의 역량 낭비다. 그 지면을 책 리뷰에 써서 조밀한 구성을 조금이라도 완화하기를 바란다.

 

 판타스틱은 장르의 오랜 팬들이 읽기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기사를 실고 있다. 그러나 [장르]란 게 뭐지? 하고 기웃거리는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입문서, 참고서 역할을 한다. 그간 GQ나 에스콰이어, 맥심 같은 남성 잡지들에서 최신 트렌드를 따라간답시고 장르 소설 작가나 작품을 간간히 소개해왔는데, 그 역할을 판타스틱이 전담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지금까지 판타스틱과 같은 잡지는 없었다. 본래 판타스틱이 출범하기 전에 소개되기로는 SF/판타지 전문 잡지가 나온다길래 무척 기대를 했다. 하지만 박상준씨가 편집장에서 물러나고, 무협, 로맨스, 스릴러 같은 장르를 끌어들이기 시작하더니, 창간 1년이 훌쩍 넘은 이젠 [잡지]라는 성격에 아주 걸맞는 잡종 잡지가 되어버렸다. 안타까운 일이기도 하지만 다행한 일이기도 하다. SF/판타지 전문 잡지도 좋지만 이런 잡지도 필요하긴 하다. 애초에 어떻게 한국에서 SF/판타지 같은 폭이 좁은 장르만을 다루는 잡지가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지금의 판타스틱은 제한된 여건에서 최대한의 결과를 얻어내고 있다.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들의 노력에 박수는 쳐줄 만하다는 얘기다. 

 

 앞으로 판타스틱의 분발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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