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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책/오늘 읽은 비소설

판타스틱 08년 10월호

 잠깐 해프닝이 있었다. 판타스틱 11월호는 없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해프닝으로 끝날 일일까. 한 번 경영 악화가 되었다면, 두 번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다. 갑작스런 유동성 위기일까? 판타스틱이 무슨 대단한 기업도 아닌데 유동성 위기씩이나 생기겠는가. 그냥 구멍가게 같은 건데. 이미 판타스틱의 재정 상황은 기울었고 회생 가능성도 불확실하다는 내부적인 공감대가 형성된 것일 게다. 판타스틱 12월호가 멀쩡히 집으로 배송되기 전까지 나는 판타스틱의 존속을 믿을 수가 없다.

 

 나는 본래부터 판타스틱에 대해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판타스틱은 시작하기를 sf/판타지 잡지로 시작했다. 박상준씨라는 오래된 sf 팬을 편집장으로 모시고 제대로 한 번 해보는가 했다. 그러나 현재 판타스틱의 잡지적 성격은 장르 문화 잡지라기보다는, 그냥 마이너한 취향의 잡다한 만화나 소설을 모아놓은 잡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래서는 오랫동안 장르를 즐겨온 독자들에게도, 장르가 뭔가 해서 기웃거리는 독자들에게도 만족스러울 수가 없다. 올드비들은 판타스틱이 너무 얕다고 말하고, 뉴비들은 판타스틱이 갈수록 매니악해진다고 불평하는 형국이다. 판타스틱은 자리잡기에 실패했다. 판타스틱의 위기는 다분히 본원적인 것이다. 

   

 게다가 판타스틱은 이번 휴간 사건에서 대처 미숙을 보여줬다. 판타스틱 담당자들은 인터넷도 안하는 걸까? 이글루스 렛츠 리뷰 취소 건이 올라오고 채 3시간도 지나기 전에, 각 장르 사이트들에서는 판타스틱이 뭔가 이상하다는 냄새를 맡은 글들이 올라왔다. 모르긴 몰라도 판타스틱에 전화를 건 사람도 여럿 있을 것이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면 당장 홈페이지에서 해명을 했어야 한다. 당장. 1시간도 지체하지 말고. 그런데도 렛츠리뷰 취소 건이 먼저 올라오도록 방치했다. 왜 그렇게 느려터졌는가. 이토록 신속한 인터넷 시대에 오프라인 잡지를 내다 보니까 감각이 무뎌지기라도 했는가. 얼마나 많은 정기구독자들이 판타스틱의 입장을 알기 위해 판타스틱 홈페이지를 클릭했을까를 생각하면 살짝 화가 난다.   

 

 유일한 장르 잡지라는 허울에 속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판타스틱이 뭔가 좀 부실하다는 것 정도는 다들 동감하고 있는 얘기일 것이다. 판타스틱이 위태위태하다는 것을 느낀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앞으로 판타스틱의 행보가 주목된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각설하고, 판타스틱 리뷰에 들어가겠다.

 

 

 기사

 

 이번 판타스틱의 특집은 장르 작가들의 블로그 목록이었다. 많기도 하고 길기도 하다. 개중에는 이름이 익숙한 작가도 있고 낯선 작가도 있다. 익숙한 작가들은 익숙한대로 흥미로웠고, 낯선 작가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블로그를 이용하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한국의 경우에는 인터넷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작가는 단 한 명 밖에 없다. 이외수. 이번에 판타스틱에서는 이외수씨를 장르 작가로 포함하지 않았는데 상당한 실수라고 생각한다. 좌백 같이 폐쇄적으로 블로그 운영을 하는 작가에 비한다면, 이외수씨처럼 활발한 넷 활동을 보여주는 작가야말로 대대적으로 주목할 만하다.

 

 작가들의 블로그를 탐방한다. 재미있는 시도였다. 그리고 그게 다였다. 이번에도 너무 많은 작가들을 소개하는 나머지 개략적인 설명에만 그쳤다. 유명하거나 특이한 작가 5명만 뽑아서 자세히 설명하고 다른 작가들은 그냥 주소만 제공하면 된다. 흥미가 있으면 직접 찾아가서 볼 것이다. 별 볼일 없는 작가들까지 일일히 설명해줄 이유가 있는가. 이 작가의 홈페이지는 업데이트가 안 된다. 이 작가는 블로그를 만들어놓고 방치해놓고 있다. 대체 이런 종류의 정보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마지막으로 올라온 글은 이런 것이다. 라는 정보를 독자가 알고서 고마워라도 할 것 같은가.

 

 요코미조 세이시를 조명한 것은 나름대로 적절했다. 국내에 최근 많은 작품이 소개되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지만, 일본 장르 문학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비해 국내에선 정보가 많이 부족했다. 시의적절하고 내용도 그 정도면 교양 수준이어서 무난했다. 이런 종류의 기사가 판타스틱이 아무리 못해도 중간은 갈 수 있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하드보일드 탐정을 소개한 기사의 경우에는 약간 애매했다. 분석의 수준이 도식적이지 않았나하는 점이 있다. 그리고 하드보일드의 경우에는 누아르라는 영화 장르로 재탄생한 점이 흥미로운데 매체를 넘나드는 연결점을 찾아내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개인적으로는 하드보일드와 일본의 협객 영화 사이에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궁금하다. 과연 미국의 하드보일드적 정서와 일본의 협격 영화적 정서는 어떤 점에서 유사하고 다른지 비교/대조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시도였을 것이다. 역사적인 배경을 들먹이면서 많이 써놓기는 했는데 너무 뻔한 분석이었다.

 

 

 총평

 

 전체적으로 무난했다. 작가들의 블로그를 살펴본다는 시도도 신선했고. 판타지/SF 컨벤션인 '드래곤 콘' 탐방기는 잡지의 본래적 성격에도 맞고 충분히 흥미로웠다. 이번에도 역시 컴퓨터 앞에서 쓴 것 같은 기사들 일색이었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A-

 

 

 

 소설

 

 진산의 [그릇과 시인 이야기]는 최악이었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엉성한 줄거리도 아니고, 뭘 말하려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주제의식도, 매력 없는 제목도, 지루하기 짝이 없는 문장도 아니다. 이야기의 힘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한 마디로 재미없다. 어떻게 이런 '똥덩어리' 같은 소설을 돈 주고 살 생각을 했는지 놀랍기만 하다. 액자 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액자소설이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액자 안의 이야기도, 밖의 이야기도 필연성 없이 전개된다. 일기를 쓰고 싶으면 집에서 컴퓨터로 쓰면 되는 것이지, 굳이 여러 사람들이 보는 잡지의 지면을 빌릴 필요는 없다. 

 

 츠츠이 야스타카의 [꿈의 검열관]은 탁월했다. 마치 고등학생이 쓴 것 같으면서도 작가의 정신분석학적인 내공이 여실하게 드러나는 소설이었다. 흡인력이 대단했고 무엇보다도 재밌었다. 소설은 재밌어야 한다. 그 점에서 진산의 소설은 실패한 것이다.  진산은 소설보다는 게임에 더 많은 재능이 있는 것 같은데 앞으로 그 쪽으로 많은 진전이 있기를 기원한다.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의 래비린스는 가벼우면서도 뒷 이야기가 기대되는 소설이다.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하면서도 이토록 덜 PC(Political correctness)하게 쓰는 것도 재능이다. 진정 PC하려면 그렇다는 티를 내지 않아야 한다. 만약 마일즈가 양성인인 벨의 구애를 받아들였다면 이 소설은 PC하기는 했겠지만 역겨웠을 것이다. 진정으로 PC하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생각과 상식적인 행동에서 나온다. 게이를 역겹다고 말하는 건 편협한 게 아니라 솔직한 거다. 만약 게이를 역겹다고 생각하면서, 내색하지는 않고, 고용에서 불이익을 준다면 - 바로 그 차별적인 행동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게이를 역겹다고 생각하는 그 사고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사고와 행동을 구별하지 못하곤 한다. PC함이란 행동이지 생각이 아니다. 백 날 PC하게 생각해봐라. 한 번 장애인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리면 끝이다.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는 바로 이것을 알고 있고, 국내의 많은 꼴페들은 그걸 모른다.

 

 그림자 잭은 약간 늘어지는 느낌이 있었지만 역시 재미있었다. 실비와 브루노는 중간 정도는 했고, 할티노는 원래 분량에서 줄였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상황파악이 잘 안 되었다. 짧다고 해서 명료한 것은 아니다. 진부한 관계 공식이 아니었다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도 몰랐을 거다. 다행히도 매우, 무척이나, 아주 진부한 이야기 구조라서 기승전결은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총평

 

 국내 작가의 작품이 확실히 떨어진다. 진산은 기성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 우리 나라 장르 기성 작가의 수준이 얼마나 일천한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잡지에 수록하기에는 부끄러운 수준이다. 할티노의 경우에도 황금드래곤 문학상 수상작인데도 불구하고 왜 당시에 화제가 되지 못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국내 작가의 수준이 떨어진다기보다는 해외 작가의 수준이 너무 높은 건지도 모른다. 평가는 B+

 

 

 

 기타 주목할만한

 

 판타스틱이 렛츠 리뷰에 책을 뿌리더니 대신에 독자 편지를 받아왔다. 읽어 보면 나만 판타스틱을 욕하는 게 아니구나 싶어서 참 다행이다. 여러분도 10월호 판타스틱 {독자편지}란을 읽어보면 내가 아주 막돼먹은 소리를 하고 있는 게 아니란 걸 인정하게 될 것이다. 나만 이런 생각하는 게 아니라니까?

 

 

 

 기타 무시할만한

 

 김성희씨의 {우편번호 133-093}은 못 그린 그림과 특이한 그림을 착각하는 대표적인 사례인 것 같다. 내용도 별 게 없다. 대충 이상하게 그리고 괴상한 얘기 한다고 해서 재밌어지는 게 아니다. 전형적인 순정만화체이지만 감동적인 권교정씨의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를 보면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