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멘이란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소녀적인 취향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시중의 유행어인지 아니면 작가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호타루의 빛]에서 [건어물녀]라는 용어가 등장해서 한때 일본에서 화제가 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과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일본에 오토멘이 있다면 한국에도 [토이남]이란 용어가 있다. 매거진 t의 김현진씨가 자신의 칼럼에서 사용한 용어인데, 이 용어 역시 그녀가 만들어낸 것인지 아니면 본래 있는 용어인지는 잘 모르겠다.
http://www.magazinet.co.kr/Articles/article_view.php?mm=004006000&article_id=45241
토이남 또한 오토멘처럼 낯간지러운 짓을 잘하는 남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다. [오토멘]의 주인공은 검도부 주장이고 스타일도 좋은 호남인데도 불구하고, 인형과 단 것과 요리, 자수를 좋아하는 소녀 취향의 남자다. [우리 결혼했어요]에서 알렉스가 대표적인 토이남, 오토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알렉스는 키가 작은 반면 [오토멘]의 주인공 아스카는 키가 크다. (내가 알렉스가 게이 같다고 생각하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님.)
물론 순정만화 답게 무척 미형으로 그려져 있기는 하지만 설정 상으로는 날카로운 눈매를 가졌다. 불량배조차 껌뻑 죽을 만큼 카리스마가 있다는 설정이다. 용기 또한 대단해서 수시로 정의를 위해서 주먹을 휘두른다. 여자들도 많이 따른다. 그럼에도 한 여자만을 사랑하고 그녀를 위해서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그러면서도 그녀에게 친구 이상으로는 다가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 전형적인 소녀다. 실제로 이런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어차피 이건 소녀 만화다.
소녀 만화는 소년 만화와는 달리 현실에서 진행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내용을 보면 소년 만화보다도 더 환상적인 경우가 허다하다. 등장인물의 조형이라거나 사건 전개, 설정, 결말까지 황당무계하기 그지 없다. 솔직히 [원피스]에서 제프가 자기 다리를 뜯어 먹는다는 얘기보다 [오토멘]에서 도시락을 싸며 두근두근 대는 10대 소년의 모습이 훨씬 더 개연성이 떨어진다. 왜냐하면 [원피스]의 세계는 본래가 황당무계한 물리 법칙과 상황 법칙으로 이루어졌지만, [오토멘]은 일상적으로 접하는 세계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오토멘]은 어디까지나 '판타지' - 이것과 소설군으로서의 '판타지'는 구분되어야겠지만, 사실 구분해봤자 별 건 없다. - 에 불과하다. 그건 작가가 아스카의 친구인 소녀 만화 작가를 통해 누누히 강조하고 있는 사실이다.
주인공 아스카의 남자 친구인 타치바나는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하지만, 사실은 오토멘인 아스카를 모델로 해서 순정만화를 그리고 있는, 대 인기 만화가다. 그런데 타치바나의 만화, 만화 속의 만화 - [러브틱]에서는 아스카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로 그려지고 있다. 이는 아스카의 본성을 구현한 것으로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오토멘]에서 아스카가 좋아하는 여자친구인 미야코즈카는 요리는 못하고 싸움만 잘하는 소녀라는 점이다.
즉, [오토멘]은 양성성의 신화다.
주인공 아스카는 집안 내력으로 인해 남자다울 것을 강요 받았다. 그의 아버지가 여자가 되고 싶다며 가출하는 바람에 어머니는 아스카를 남자답게 키우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니 아스카는 엄청난 소녀 취향의 남자아이였고, 이 소녀의 마음과 소년의 몸은 불균형을 간직한 채 시간이 흐른다. 때문에 외부의 시선으로 보자면 여전히 아스카는 멋진 청년이지만, 아스카의 친구들이 아는 아스카, 아스카 자신이 아는 아스카는 소녀의 마음을 가진 부드러운 남자 - 오토멘이다.
작품에서는 아스카가 자신이 오토멘이란 사실을 부정하다가 긍정하는 장면을 여러번 보여주면서 이를 매우 감동적으로 연출하고 있다. 외부의 시선을 깨고 양성성의 아름다움을 계몽하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인다.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
하지만 여자 중에서 정말로 여자다운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요리도 잘하고 귀여운 것을 좋아하고 옷은 핑크로만 입고 공예에 능하며 사려깊고 목소리가 아름답고 차분하고 마르고 하늘하늘한 팔다리를 가진 여자는 사실 극소수다. 매우 마른 몸을 가진 남자인 나는 나보다 팔뚝이 굵은 여자를 수없이 보았다. 그렇다면 나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인가. 이건 단순히 성기 유무를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여자와 남자의 구분 - 젠더가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주목받는 것은 이미 진부한 담론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문제 제기를 소녀 만화를 통해서 경험한다는 것은 매우 유쾌한 일이다. 이토록 황당한 상황 설정 속에서도 뚝심 있게 이야기를 몰고나가는 만화를 보는 일은 더욱 그렇다.
[오토멘]은 순정 만화치고는 대사가 그리 많지 않다. 한국의 순정 만화 작가들이 싸움 장면만 나오면 의성어나 번개 치는 장면으로 해결하는 경우까지 있는 것에 비하면, 비교적 사실적인 싸움도 나온다. 작가의 성향 자체가 순정 만화라기보다는 그저 동인 만화에 가깝지 않나 생각한다. 주인공과 친구 사이에 묘한 기류가 감지되는데, 이것은 BL 물이나 동인물을 오랫동안 창작하고 향유한 작가이기에 가능한 연출이라고 생각한다.
읽다 보면 곳곳에서 나오는 계몽적 어조가 거슬리기도 한다. 이를테면 여자가 백마를 타고 나타나 오토멘인 주인공을 구해준다든가, 공포의 집에서 벌벌 떨고 있는 주인공에게 여자가 손을 내밀며 "지켜줄게"라고 말하는 장면이 그렇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작가가 결코 역 남성 우월주의에 매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지켜 줄 이유가 없듯이 여자 또한 남자를 지켜 줄 이유가 없다.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고 지켜주는 것은 각자가 사람이고, 사람은 항상 사랑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며 또한 서로 지켜준다.
"내가 널 평생 지켜줄게."
남자든 여자든 독점권을 행사할 대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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