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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책/오늘 읽은 만화

수수께끼 그녀 x,

 

 

 '수수께끼 그녀 x'의 주인공 츠바키 아키라는 17세 소년입니다. 아키라에게는 우카베 미코토라는 여자친구가 있지만, 여자친구가 있는 17세 소년보다는 여자친구가 없는 17세 소년이 세상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죠. 내가 열일곱 때도 당연히 여자친구가 없었습니다. 열일곱- 사춘기의 한가운데 있는 소년에게 소녀는 이질적이고 불가사의하며 다양한 의미에서 압도적인 존재. 만약 열일곱 시절의 나에게 여자친구가 있었다면 물론 기쁘겠지만, 그와 같은 정도나 그 이상으로 당혹스러움도 느끼지 않았을까, 라고 어른이 된 지금 생각합니다.

 

 - 작가 후기 중 발췌 -

 

 
  게임을 많이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게임을 많이 하면 [게임 불감증]이란 것에 걸린다. 아무리 대작 게임이라 하더라도, 설령 폐인을 양산하는 게임이라 하더라도 별 감흥이 없어지는 경지를 말한다. 이건 게임만이 아니라 책이나 만화, 영화에도 적용된다. [책 불감증], [만화 불감증] 같은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작품, 감동적인 작품, 현학적인 작품을 보아도 별 충격도 없고 느낌도 오지 않는다. 끔찍한 장면, 눈물겨운 상황, 사랑스런 주인공, 애잔한 묘사, 통쾌한 대사를 봐도 그냥 그러려니 한다.

 

 그래서 나는 자극적인 작품을 많이 본다. 아니, 많이 보려고 한다. 숨어있는 보석 같은 작품들이 가끔 있다. 단순히 팔 다리가 잘려나가는 수준을 말하는 게 아니다. 세계가 새로 열리는 느낌, 가치관이 완벽하게 바뀌는 감각, 지금껏 믿어왔던 논리 체계가 단번에 무너져버리는 광경을 보고 싶다. 내 불감증을 한방에 날려 버릴 수 있는 물건을 읽고 싶다.

 

 그러나 그런 작품은 많지 않다. 왜냐하면 세계관, 논리의 전복을 유도하는 작품은 항상 [소수]이기에 그러한 효과를 자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 기계적인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신선함이란 [숫자]의 문제다.

 

 [데스노트]는 살인에 대해 흥미로운 고찰을 보여줬지만, 이젠 아무도 그것을 새롭다고 느끼지 않는다. 이는 [데스노트]를 본 독자의 숫자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비슷한 성향의 작품이 많거나, 한 작품의 독자가 많아지거나 하면, 그 작품에 담긴 생각은 진부해져 버린다. 때문에 나는 고고학자처럼 책과 책 사이를 파고 들어간다. 진짜 신선한 고기를 찾기 위해서.

 

 그렇게 찾은 고기가 바로 [수수께끼 그녀 x]다. 표지와 제목, 그림체만 봐서는 이 만화의 진가를 결코 알 수가 없다. 한국 대여점에 깔린 흔한 일본 만화라고 보면 큰 오산이다. 이 만화는 [애프터 눈] 소속이다. 충사, 카페 알파, 백귀야행, 오 나의 여신님, 플라테네스, 현시연, 기생수, BLAME!이 연재되고 있거나 연재된 바로 그 잡지 말이다! [애프터 눈]은 일본 내에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잡지이지만, 그 잡지에 연재된 작품은 잡지 판매 부수보다 더 많이 팔리기도 한다. 또한 한국에서만 기이할 정도로 인기가 많은 잡지이기도 하다. 연재 대표작들의 면면을 보면 알겠지만 하나 같이 내 마음에 쏙 드는 작품들 - 뭔가 이상한 만화들이다. (욕하는 게 아니다.)

 

 [수수께끼 그녀 X]는 연애 만화다. 소년과 소녀가 나오고 사랑이 싹트는 그런 만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소년이 소녀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이다. 소년은 소녀의 침을 빨아먹는다. 소녀는 소년이 하루에 한 번씩 자신의 침을 먹도록 한다. 그것이 바로 둘의 사랑을 확인해주는 인연의 고리란다. 침 말이다. 침. 입에서 나오는 그거. 침을 먹는 건 AV에 가끔 나오는 장면이니까 그렇다 치자. 그런데 이 소녀는 자신의 팬티에 가위를 끼워넣고 다니고, 특정 상황이 오면 그 가위를 빼들어서 (물론 그 과정에서 소녀의 팬티가 노출된다.) 마치 영화 [가위손]처럼 종이를 잘라서 멋진 작품을 만들어낸다.

 

 둘은 연인이지만 소녀는 손도 못잡게 하고, 포옹도 안되고, 키스도 안된다고 한다. 가능한 건 오직 소년이 소녀의 침을 먹는 것 뿐이다. 소녀는 자신의 감정이 침을 통해 소년에게 전해진다고 말한다.

 

 대체 이런 사람이 어딨어? 소년은 묻는다. 넌 대체 뭐야?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소녀는 대답한다.

  

 왜냐고 묻는다면, 난 그런 사람이니까.

 

 마치 대만의 무협 작가 고룡의 주인공들이 나누는 대화 같다. 난 원래 그래. 대체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뭐라고 말하겠는가. 눈 밝은 독자라면 눈치챘겠지만 이 대사는 판타지란 장르의 속성에 맞닿아 있다. 판타지는 작가가 내놓은 설정을, 아무리 어이없더라도, 일단 사실이라고 믿고 넘어가야만 성립하는 장르다. 왜 마법사가 마법을 쓰냐고? 왜 사우론처럼 무서운 괴물이 버티고 있냐고?

 

 원래 그래.

 

 이 벽을 넘지 못한다면 그 책을 읽을 수가 없다. 그런 사람들은 역시 판타지는 유치하다거나 그게 말이 되냐는 식으로 넘겨 버린다. 하지만 내적인 논리만 치밀하다면 그 어떤 거짓말을 해도 괜찮은 것이 판타지다. 팬티에 가위를 끼워 넣고 다니는 소녀를 당신이 받아넘길 수 있다면, [수수께끼 그녀 X]는 당신이 지금까지 읽어 본 만화 중 가장 유쾌한 작품이 될 것이다. 어이가 없어서 책장을 덮는다면? 그건 읽는 사람 손해다.

 

 [수수께끼 그녀 X]는 소년이 가질 법한, 그래 아주 특이한 소년이 가질 법한, 성적인 상상을 멋지게 형상화했다. 이 만화는 스크린 톤을 거의 쓰지 않고 펜선과 먹만으로 그려졌는데, 마치 흑백 영화를 보는 것 같아서 황당한 내용과 설정을 상쇄하는 역할을 한다. 한 편에선 소녀가 완전히 벌거벗고 있지만, 고전적인 그림체는 성욕이나 충격과는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90년대 에로 게임 - 시즈쿠?  -을 하는 느낌이랄까. 흑백의 누드는 야동과는 다르다. 그건 좀 더 고상하고 우아한 무엇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가슴이 파인 비비안 리를 볼 때의 감각 정도라고 해두자. 

 

 단순하게 보면 이 만화는 최근 유행해서 아예 유형화가 되어 버린 소년과 소녀에 관한 이야기다. 일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 소년에게 비일상적인 소녀가 갑자기 나타나고, 소년은 비일상에 깊숙이 빠져들어간다는 얘기 말이다. 예를 찾고 싶다면, 에반게리온을 보면 된다. 시중에 깔린 많은 라이트 노벨도 결국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수수께끼 그녀 X]는 충격적인 작품이다. 현실의 물리 법칙을 충실하게 지키면서도, 완전히 비현실적인 인물을 창조해내는 일에 성공한 것이다. 이 부조리, 불일치가 매력이다. 정말정말 찾기 힘들겠지만, 세상 어딘가에는 그런 소녀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팬티에 가위를 꽂고 다니는 소녀는 거대 로봇을 타는 소년보다도 더 믿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자 열일곱 소년에게 여자친구가 생긴다는 상황은 알고 보면 소위 '로봇 애니메이션'의 상황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소년이 거대 로봇이라는 압도적인 존재의 조종사가 됨으로써 시작되는 환희와 전율의 나날. 소년이 여자라는 압도적인 존재와 서로 좋아하게 됨으로써 시작되는 기쁨과 당혹스러움의 나날. 소년이 미지의 존재와 만나고, 새롭게 열리기 시작한 세계 속에서 우왕좌왕하는 점에서 이 둘은 비슷하지 않을까요.

 

 -작가 후기 중 발췌-


 결국 주인공이 살고 있는 세계는 진부한 세계다. 학교에선 공부해야 하고, 가끔 전학생도 오고, 그 녀석은 뭔가 좀 이상한 녀석이다. 그런데 만약 그 전학생과 내가 사귀게 된다면? 연애란 만화나 소설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충분히 환상적인 포장에 싸여 있다. 그것은 비일상의 영역이다.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연애 문제에 과도하게 집착한다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근대 이후로 세계는 연애를 원하고 있다. 지겨운 삶을 어떻게든 회피하려는 눈물 겨운 시도다. 설령 그 대상이 약간은 감당하기 벅찬 소녀라 할지라도 말이다. 소녀는 아직 어리고 순수하다. 그건 소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그들의 일상이 비일상과 완벽하게 합치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풍경 속에서 무엇을 찾아내야 할까. 아마도 즐거움. 그게 맞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