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눈물의 맛을 알고 있습니까?
몰라도 상관 없다.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사채꾼 우시지마는 단순한 만화가 아니다. 절규다. 공포다. 발악이다. 이 만화를 읽고 소름이 끼치지 않거나 어찌할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이다. 한국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다 보면 한 번은 사채를 빌려야 할 일이 생긴다. 아버지가 아파서일 수도 있고, 바다 이야기를 하다가 빚을 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유는 아무래도 좋다. 누구나 돈이 급하게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제발 우시지마에게는 찾아가지 말기를 바란다. 녀석은 악마니까.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악마만은 피하기를 바란다.
[사채꾼 우시지마]의 주인공은 22살 짜리 사채꾼이다. 이 자는 사람들에게 소액 대출을 해주고 무슨 방법을 써서든 받아낸다. 만화 주 내용은 어떻게 사람들이 우시지마를 찾을 정도로 망가지는지 그리고, 또 우시지마는 그들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에게서 얼마나 악독한 방식으로 돈을 받아내는지를 그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 만화는 일본 만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직업 만화인가. 도박사를 다루면 도박사 만화, 항문 전문 의사를 항문 전문 의사 만화가 된다. 이번에는 떳떳하지는 못하지만 [사채꾼] 만화인가. 그런가. 주인공은 갖가지 역경을 겪는다. 경찰이 찾아오기도 하고, 돈을 떼먹는 놈들이 오히려 공격해오기도 하고. 주인공이 찌질한 자식들의 돈을 천신만고 끝에 받아내고, 저 멀리서 라이벌 사채업자가 등장하고, 이 만화는 그런 얘기인가.
아니다.
이 만화는 그런 만화가 아니다.
[사채꾼 우시지마]는 이 사회의 병폐에 대한 얘기다. 이 만화의 주인공은 사채업자가 아니다. 세상에서 소외받고 치이는 사람들 모두다. 1권에서 빠른 속도로 주인공 소개를 마친 만화가는 곧바로 우시지마를 중심에서 끌어내린다. 주인공은 아예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에피소드가 줄줄이 이어진다. 부제는 이렇다.
불량소년, 게이, 날라리, 프리터, 샐러리맨, 풍속업소 아가씨.
마나베 쇼헤이는 사채업자 만화를 그리고 싶은 것이 아니다. 사채업자를 찾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들, 제1 금융권에서는 상대도 해주지 않는 인간들 - 이 사회의 쓰레기들, 벌레들, 열등생들이 일본이란 고도 성장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그리고 싶은 것이다. 알겠는가. 패배자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마치 조각 퍼즐을 맞추듯이 일본의 어둠을 맞춰가고 싶은 것이다.
작가는 일본 사회에 대해 수많은 독설을 퍼붓는다. 등장 인물의 입을 빌려서 1페이지도 좋고 2페이지도 좋다는 식으로 떠들어댄다. 극 전개에 상관도 없는데도 인물을 수다쟁이로 만든다. 그렇다고 작가가 근거도 없는 불평 불만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는 의료기기 사업이 악화 일로를 걷는 이유를 정부의 개인 의료비 부담 증가 정책 때문이라고 진단하는 식으로 매우 예리하고 심도 있는 분석을 보여준다. 작가는 일본 만화 특유의 엄청난 취재와 사전 조사로 일본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파고 들고 있다. 정부의 공무원들은 그저 서류를 만들 뿐이고, 그 윗대가리들은 서류에 도장을 찍을 뿐이며, 정치가들은 다음 선거에서 승리할 방법만을 찾는다. 국민들은 생활이라는 악몽에 갇히도록 강요 받고, 자본의 흐름은 휘황한 불빛으로 모두를 속인다.
개인은 뭉개진다. 샐러리맨의 독백을 들어보자.
만약, 이대로 내가 죽어버리면 울어줄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내 인생은 대체 뭘까.
병원을 돌아다니며 죽기살기로 매달려 의료기기를 파는 하찮은 샐러리맨.
나는 회사에 소중한 시간을 팔고 있다.
날마다 고민하고, 헤매고, 조금씩 닳아서,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내 인생을 팔고 있다.
사람은 가끔 절규하고 싶은 때가 있다. 아내가 도망갔기 때문일 수도 있고, 직장에서 짤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돈이 없어서, 일이 재미 없어서, 나이가 들어서, 직장 상사가 괴롭혀서일 수도 있다. 그럴 때 이 만화를 읽으면 좋을 것이다. 이 만화에는 그런 사람 밖에 안 나오니까. 그들에게 희망따윈 없다. 우린 그저 삶 자체에 속는다. 물론 삶이 우릴 속이지는 않는다. 우리에게서 돈을 앗아가는 것은 바로 옆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는 다른 사람 - 타인이다. 그럼 그를 미워해야 할까. 나의 절망과 고통은 정말로 모두 이명박 때문일까. 노무현이 잃어버린 10년을 만들었을까. 김정일이 없으면 북한의 인민들은 민주주의를 쟁취할 수 있을까.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면 세계 평화가 이룩될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세상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이기 이전에, 나 자신이 그 잘못된 세상의 일부라는 점이다. 즉, 세상이 잘못되었다면, 그건 내가 잘못되었다는 말과 같다. 남 탓 하지 마라. 어차피 우시지마에게 찾아가서 굽신거리며 돈을 빌린 건 당신 아닌가. 우시지마는 아주 친절하게 얘기해줬다. 당신이 돈을 빌리면 이자가 얼마 붙고 상환 기간은 얼마라는 것을. 그런데 당신이 못 갚은 거 아닌가. 당신이 어리석어서 이 사회에서 살아남지 못 한 거 아닌가. 나는 어째서 별볼 일 없는 대학을 다니고 있냐고? 그건 학창 시절에 공부를 안해서 아닌가. 부모님이 돈 없어서 학원을 못 갔다고? 글쎄. 그럼 애초에 부잣집에 태어나지 그랬나. 왜 나는 비정규직일까. 그거야 당신이 정규 직원이 될 만한 실력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당신은 돈도 없고 빽도 없고, 학벌도 없고, 실력도 없고, 영어도 못하고, 외국 유학도 못 갔다 왔는데 어떻게 감히 정규직이 되길 바라는가. 닥치고 여기 와서 빠찡코나 해라. 돈이 필요하다면 우시지마에게 빌리고. 어떻게 갚냐고? 당신 몸이 있잖아. 여자라면 대딸방이나 키스방 가서 돈을 벌면 된다. 그건 다리를 벌리지 않아도 되는 일이니까 서로 서로 좋잖아. 남자라면 노가다라도 뛰든가. 아니면 당장 죽든가.
일본의 사회 현상은 어떤 방식으로든 한국으로 유입된다. 왕따가 그랬고, 원조교제, 풍속 업소 (유사 성행위를 하는 곳으로 한국의 키스방, 대딸방등과 비슷), 오타쿠, 히키코모리가 그렇다. 사채꾼 우시지마에서 그리고 있는 지옥도는 그냥 일본 얘기니까 상관 없다는 식으로 넘길 얘기가 아니다. 한국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나도 학교를 졸업하면 파견 사원 - 비정규직이 될 테고, 어쩌면 프리터가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백수가 되어서 바다이야기 2탄을 찾아다니며 결국 소액 사채업자에게서 돈을 빌리게 될지도 모른다.
사람의 앞 일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래서 무서운 거다. 삶이란 것이. 이 만화가.
이제 당신은 눈물의 맛을 알고 있습니까? 그 지독하게 쓴 맛을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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