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문제가 있다. 과연 패배자의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내가 말하는 패배자는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즉, 영화나 만화에 나오는 허황한 목표를 추구하다가 좌절하고 마는, 대악인이나 정신나간 천재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냥 평범하게 살아오다가 IMF나 질병, 교통 사고 같은 것 때문에 인생의 행로에서 벗어난 사람을 가리킨다. 지하철에서 폐지를 수집하는 사람, 아파트 근처 나무 정자에서 노숙을 하는 사람, 술집의 음식 쓰레기를 뒤져 배를 채우는 사람, 지하철에 자리를 펴고 밤을 보내는 사람, 인간 쓰레기, 히키코모리, 노숙자, 일일 노동자, 쪽방 사람들, 가난이 몸에 배어서 더이상 움직일 수조차 없는 사람들.
대체 그런 인간들에게 어떤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일까. 물론 나는 그들에게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강전설 쿠로사와를 통해 배웠다. 만화나 읽고 삶의 의미를 깨우쳤다고 말한다고 해서 비웃지 말라. 너희는 언제 한 번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나 있느냐. 지하철에서 노숙자를 만날 때마다 인상을 찌푸리고, 옷을 허름하게 입은 사람이 옆에 앉으면 병이라도 옮을까봐 자리를 옮기는 너희들 아니냐. 소위 명문대에 다니니 나는 오타쿠라도 나중에 성공할 줄 아는 대학생인 너! 집에 돈이 많으니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하는 너!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빠져서 하루 종일 헤롱대는 너! 그렇게 배운 일본말을 중얼거리며 푼돈이나 버는 너! 어학 연수를 다녀오면 그래도 취직이 잘 될 거라고 생각하는 너! 사회가 불안하니 고시라도 준비해야겠다며 노량진을 들락거리는 너! 영어는 기본이라며 부모에게서 학원비나 강탈하는 너! 수백만원의 등록금을 도둑질하며 지금 컴퓨터를 부여잡고 있는 나!
너희들 모두에게도 인생의 의미가 있듯이, 사회의 암적 존재라 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각기 의미가 있다. 언제나 무릎 꿇는 인생, 항상 포기하는 삶, 누구에게나 고개를 숙이는 생활, 그런 존재로 남으면서도 여전히 생존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에게 나는 경의를 표한다. 산다는 건 싸우는 것이다.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청년하고도 싸우고, 강의실에서 소리치는 인간하고도 싸우고, 직장에서 허구헌날 쓸데없는 걸로 꼬장을 부리는 상사하고도 싸우고, 집에만 오면 볼멘 소리를 해대는 마누라하고도 싸우고, 대가리 컸다고 아무 일로나 덤비는 자식놈하고도 싸운다. 인내심이란 방패와 의지라는 칼로. 삶이라는 전장에서 우리는 '나'라는 대마왕을 향해 보도블럭을 뜯어 던진다. 연좌농성을 벌인다. 단식을 한다. 피를 흘리며, 눈물을 뿌리며.
결국 주인공 쿠로사와는 버러지였다. 그는 가족도 없고, 직장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죽을 때도 그의 곁에 있었던 건 깡패와 노숙자들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정당화하며 말한다.
"거대한 손바닥... 이길 수가 없다. 너무 강해! 서서히 압사하는 듯한 나날. 그래도. 저항했다. 나는 저항했다. 굴복하지 않고 저항했다. 싸웠다!"
싸우는 이에게는, 이 빌어먹을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는 이에게는 존경을 표하자고. 후미모토 노부유키는 말한다. 이 만화가는 40이 넘어서까지 어시스턴트 생활로 먹고 산 인물이다. 한때는 빠찡코에도 빠졌고 술에 쩔어서 살았다고 한다. 그는 인기 없는 만화가였다. 그러던 어느날 절치부심하고 그려낸 만화가 [도박묵시록 카이지]였고, 그는 성공했다. 최고가 되었다. [최강전설 쿠로사와]의 주인공 쿠로사와는 패배자였던 작가의 분신이다. 그는 자신의 만화에서 항상 젊은이들에게 훈계한다. 인생을 낭비해도 좋다. 쓰레기가 되어도 좋다. 하지만 눈 앞의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말고 싸워라. 해봤자 손해라고? 포기하는 게 낫다고? 그딴 건 집어치우고 일단 뛰어들어 주먹을 휘둘러라. 그게 남자다.
노숙자가 되는 건 대개 남자다. 남자는 자신의 손으로 일어설 수 없으면 그저 끝없이 추락하는 수밖에 없다. 마초라고 불러도 좋다. 남자라면 긍지를 갖고 일어서라. 얻어터져 죽어버릴 것 같아도 물러서서는 안 된다. 그러나 결국 쿠로사와는 죽고 만다. 죽어도 좋다. 인간이라면 일어서라. 병신 같이 주저앉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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